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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병고를 친구로 삼다 ①

“병고는 수행하는 마음을 내도록 하는 최고의 친구입니다”

▲ 인간불교의 실천을 위해 정진해 온 성운대사는 병고를 최고의 친구로 받들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질병이 있어야 수행의 마음을 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 수행자에게는 질병도 증상연이니 배척하려하지 말고 병을 친구로 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빈승은 어려서 건강한 아기였지만 눈·귀·코·입·몸과 마음의 육근(六根)에 크고 작은 병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줄곧 ‘병을 친구삼아’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인생에서 건강이 아주 중요하지만 병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영웅이 두려운 것은 오직 병으로 시달리는 것이다’라는 말은 아무리 돈이 많거나 가족이 많은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은 거절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좋은 약으로 치료하거나 심지어는 외국으로 나가서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물리치료를 필요로 하는 질병이 있기도 하고 심리치료까지 필요한 복잡한 질병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의지력이 약해서 작은 병에도 걱정이 가득하기도 한데 강한 의지와 함께 심리적으로 두려움을 갖지 않고 질병과 싸워나가면 질병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빈승은 건강을 자신하지만 사대오온(四大五蘊)으로 이루어진 신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각종 양식을 먹어야 하는데 어찌 병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빈승이 겪은 문제들은 모두 앞에서 말한 것과 관련이 있고 크고 작은 문제들 모두 ‘시간적인 치료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사를 찾아다닐 금전적인 여력이 없었으며 예전에는 의료보험도 없었기에 오직 ‘시간적인 치료’를 할 수 밖에 없어서 자신이 병들과 서로 존중하면서 별다른 탈이 없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질병을 친구로 삼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병에 걸린 기억은 벌써 모두 잊었고 단지 10세 이전에 매년 7월 생일이면 사람이 얼떨떨해지고 두통이 있거나 정신이 몽롱하여 그 날을 마치 역병에 걸린 듯 항상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반나절 잠을 자고나면 아무 증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저는 생일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신적인 말로는 과거생의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꼭 그날 하루만 몸이 아프다가 갑자기 좋아졌을까요?

출가 이전에는 매년 한 두 번씩은 눈이 빨갛게 붓고 아팠던 기억이 있는데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어른들도 없었고 저도 나이가 어렸기에 의사에게 병을 치료해야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의사’ ‘치료’라는 이 두 명사는 저에게는 아주 생소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매년 걸리는 눈병은 대체로 하루를 더 하거나 부족하지도 않게 일주일만 지나면 저절로 좋아졌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더라도 이것이 바로 친구들이 함께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잘 지내다가 잘 헤어지니 별다르게 심각한 후유증이 없었습니다.

빈승의 아동기는 간식을 먹는 습관이 없었고 군것질할 돈도 없었기에 일반 어린이들처럼 사탕을 먹어서 치아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가 전후로 치아가 썩거나 염증이 생겨서 치통을 겪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며칠 동안 치통이 있다가 일주일이 되기 전에 괜찮아졌습니다. 그러나 15~16세가 되면서 충치로 치아에 구멍이 생겼고 매번 식사를 하면 밥알이 구멍에 들어가서 신경을 누르게 되니 통증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출가생활이 엄격하다보니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못했는데 치아는 아주 단단한 것인데 어떻게 구멍이 생겼을까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매번 밥을 먹어도 통증이 있을까봐 잘 씹지도 못하고 그냥 삼켰습니다. 거기에 혀까지 헐어서 몇 해를 보냈으니 병을 친구로 삼지 않을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17세가 되던 해, 글을 쓰게 되면서 치통을 겪는 상황을 적은 저의 일기를 보신, 저를 무척이나 아끼던 강사 스님께서 어찌하여 여태껏 말하지 않았느냐고 저를 나무라셨습니다. 강사 스님은 저의 은사이신 지개 스님께 알리셨고 은사 스님은 저에게 남경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서하산에서 출가하였기에 수십 ㎞ 거리에 있는 남경시내에는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은사 스님은 저를 데리고 서하산에서 기차를 타고 남경으로 데려가 치과를 찾아서 제가 치료받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로써 저는 치아에 병이 생기면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제 인생 처음으로 의사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의 세월에서 치아가 빠지거나 신경치료를 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90세가 넘은 지금까지 음식을 씹을 수 있도록 입속에는 여전히 치아들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치아에 생긴 질병을 친구로 삼지 않았다면 어찌 현재까지 이러한 기능을 갖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씹지 않으면 소화시키기 어렵고 위와 장에도 좋지 않다고 하는데 빈승의 삶에서 여러가지 질병이 끊이지 않았지만 위와 장은 저를 힘들게 한 적이 없이 서로 존중하면서 별 문제없이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빈승의 기억으로 중국 본토에서 학질에 걸렸던 것이 가장 심각했습니다. 매번 학질에 걸리면 오한으로 인해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여러 겹의 이불을 덮어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주기적인 오한과 고열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기에 병에 걸리더라도 그러려니 했었고 나으면 나았나보다 했는데 보통 열흘이나 보름 동안 혹은 20일 정도면 저절로 나았습니다.

서하산을 떠나기 직전이었던, 당시 17세였던 저는 학질의 발병이 가장 심각해 한두 달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뭘 모르던 저는 하소연할 줄도 몰랐고 의료상식도 없었기에 병의 원인도 몰라서 그냥 지냈습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오한과 고열이 반복되다보니 어찌할 수 없었던, 마치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숨이 곧 넘어갈 듯 의식이 없던 당시, 아마도 은사 스님의 시자였던 제 또래의 사미가 제가 누워있던 병상으로 찾아와서는 너의 은사 스님이 너 먹으라고 보냈다며 밥그릇에 절반쯤 담긴 장아찌를 내밀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당시에 좋은 음식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특히 병이 심각한 사람에게 반 그릇의 장아찌는 정말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더 가치가 있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장아찌를 먹었고 마음속으로 발원했습니다.

“은사 스님! 제가 병에 걸린 것을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맛있는 장아찌를 보내주셨나요? 저는 앞으로 출가자로서 꼭 잘 살아서 불법을 널리 펼치고 중생을 이롭게 하여 은사 스님의 자비하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 심각했던 학질은 저의 생명을 앗아가지 못했으며 약을 쓰지 않고 나은 것은 매우 의외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그 이후로 수십 년의 세월 중 다시는 학질에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대만으로 건너온 이후 정부에서는 학질을 없애기 위해 누군가 이 병에 걸리면 치료를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품까지 내걸었습니다. 국가와 사회가 이런 좋은 방법으로 환자를 돌보리라고 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쟈오산을 떠나려던 스무 살에 저는 심각한 천연두를 앓게 되어 머리 부분 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진물이 났던 고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절에서는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병이 나 죽으면 나무판으로 만든 탁자 크기의 상자에 넣어 뒷산에서 태우면 그만이었습니다. 그 병으로 피부에 발진이 나고 종기가 생기니 상처의 살점이 옷에 들러붙어 매번 옷을 벗을 때마다 뼛속까지 아팠습니다.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중에 어떤 동기생이 준 약인 술파티아졸 2알을 먹고 병이 나았습니다. 그 당시는 중일전쟁 시기로 많은 시신들이 강물에 빠져있었기에 오염된 물을 먹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다들 말했습니다.

어느 날 동기들은 다들 밥을 먹으러 갔고 온 몸에 피고름이 나서 걸을 수 없었던 저는 강원을 지키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관광객인 듯 어느 젊은 부부가 지나가다가 저를 보고 ‘몇 살이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음력 7월 저의 생일이라는 것이 문득 생각나 “오늘로 20살이에요”라고 대답했는데 그 사람은 제가 올해 20살이라고 답한 것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저는 천년고찰에서 보내는 삶에서 제가 벌써 20살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쟈오산을 떠나기 직전 우리들에게 생물학을 가르치셨던 보련(普蓮) 스님께서 수업시간에 온갖 병에 대해 말씀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의심병’이었습니다. 많은 질병이 그 자체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데 대부분 자신의 의심이 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예를 들어서 본래 폐에 병이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폐병이 있다고 의심하게 되면 정말 치료가 어렵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종찰 대각사로 돌아간 이후 저는 음식에 영양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의 폐에 병이 생겼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러한 생각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고 매일 마음속으로 “나는 폐에 병이 있어, 나는 폐병이 있어”라는 생각을 문득 문득 하였습니다. 심지어 23세에 대만으로 건너왔을 때에도 “나는 폐병이 있어”라는 생각을 수시로 하였는데 남에게 전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객혈을 하지도 않았고 폐 부위가 아픈 것도 아닌데 어떻게 폐병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 위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에게 폐병이 있다”는 이 생각은 어찌해도 지울 수가 없었고 심지어 이러한 생각은 나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게 될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1949년 어찌할 방법이 없던 상황에서 토마토가 폐병에 좋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살 희망이 생겼다고 느꼈습니다. 토마토는 비싼 채소도 아니었고 마침 제철이라서 저는 한 소쿠리를 사서 아침에도 먹고 점심에도 먹고 저녁에도 먹으면서 토마토를 이렇게 많이 먹었으니 폐병도 당연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빈승에게 도대체 폐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이후로 “나는 폐병이 있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빈승이 이런 말을 하는 뜻은 우리들의 신체적인 문제는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겠지만 만약 그러한 조건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질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의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질병을 이겨낼 용기가 있고 신심과 인내심, 용감함, 두려워하지 않는 낙관적인 생각도 병을 치유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12호 / 2017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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