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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적 뉴턴 운동법칙

부처님 법 따르고 실천하면 모두가 부처님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지니고 다니며 독송할 때, 만약, 그걸 이유로 사람들에게 하찮고 천하게 취급당하면, 이로 인하여 지난날의 죄업이 즉시 소멸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아승지겁 전에 연등불 앞에서 8만4000만억 나유타 명의 부처님들에게 공양을 올릴 때, 전혀 실수가 없이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올렸다. 하지만 이 공덕은 앞으로 올 말세에 이 경전을 지니고 독송하는 사람의 공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백분의 일도 천만억분의 일도 아니고 아예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설사 ‘앞으로 오는 말세의 사람들이 이 경전을 지니고 독송하고 얻을 공덕’에 대한 내 설법을 듣더라도, 광란한 마음으로 여우처럼 의심하며 믿지 않을 수 있다. 수보리야, 이 경전은 뜻도 불가사의하고 과보도 불가사의하다.

선업 쌓아 내세 기약하는 이에게
금강경 가르침은 용납 못할 마설
기존 상식 모두 깨는 게 금강경
상상할 수 없는 자유로움 선사해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옳게 전할수록, 듣는 이들의 반발이 심해진다.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데 왜 없다는 거야? 이거 미친 사람 아니야?” 하면서 조롱하고 멸시하고 핍박한다.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부처님의 설법을 옳게 이해하고 있을수록 박해도 심해진다. 아(我, 아트만)의 존재와 더욱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걸 ‘금강경’은 광란호의불신(狂亂狐疑不信)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박해가 심할수록, 법에 더 가까우므로, 더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 모든 부처님이 얻은 최고의 깨달음)를 얻게 된다. 과거 죄업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이보다는 그대 마음의 힘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걸 조금도 막을 수 없다.

사람들은 얻고 싶어한다. 영생과 지락(至樂)을. 못해도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누리고 싶어한다. 그런데 불교(생전의 석가모니 부처)는 힌두교와 달리 그런 것을 하나도 약속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니, ‘현생의 고통은 과거의 업의 결과이므로, 선업을 쌓아 내생에 낙을 누리고 살겠다’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마설(魔說)이다. 인간존재의 기반을 뒤흔드는 삿된 견해이다.

이런 물질적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 가르침은, 불교신자들도, 특히 불멸 2500년 후의 말세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들 수다원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사람이라 알고 있는데 ‘들어갈 곳이 없다’ 하고, 사다함은 한 번만 돌아오면 된다고 알고 있는데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고, 아나함은 안 돌아온다고 알고 있는데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다’라고 하며 기존의 상식을 모조리 깨뜨리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대중의 무지를 벗어나 무아연기(無我緣起)에 눈이 떠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은 선남자 선녀인이다. 기특한 사람들이다. 얼마나 기특했는지, 부처님은 이 사람들의 수지독송 공덕이 자신이 전생에 연등불전에 살 때 무수한 부처님들께 공양한 공덕보다도 무한히 더 크다고 말씀하신다.

소승불교에 의하면 한 세계에는 한 부처만 있다. 일세계 일부처. 그래서 부처는 한 번에 한 명씩만, 예를 들어 수천 년 만에 한 사람씩만, 가끔 출세한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이를 부정한다. 부처의 법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다 부처로 본다. 부처가 법신(法身, 진리라는 몸)이라면 자기 안에 법신을 성태장양(聖胎長養)한 사람은 다 부처라는 것이다. 크게는, 그럴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처로 간주한다. 그게 법신상주(法身常住)이다.

‘금강경’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모든 정신적 족쇄로부터 벗어나는, 이 놀라운 자유를 얻지 못한다. 아직 얻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유이다. 그래서 그걸 얻지 못하는 손해 역시 등가(等價)로 불가사의하다.

경의 뜻이 불가사의할수록 과보도 불가사의하다. 산이 깊을수록 골이 깊기 때문이다. 소위 영적 뉴턴 운동법칙(작용반작용의 법칙)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12호 / 2017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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