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눈여래 귀보살’

예전에 일본 도쿄의 강연회에서 동아시아의 불교를 소개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유럽에서 온 어떤 부인이 일어나, 깨달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불교를 잘 모르는 분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써 이미 깨달은 스승이 인가하는 것, 또 하나는 대중이 알아볼 것이라고 했다.

전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통적인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길을 말한다. 후자는 깨달은 사람의 말과 행동과 마음을 보고 대중들이 판단하는 것이다. 결국 전자는 나름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며, 후자는 깨달음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일이다. 가끔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이 자행자지함으로써 그 분의 깨달음에 대한 진위논쟁이 붙기도 한다.

언젠가 어떤 우화를 읽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것이다. 어느 선사가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그 내용을 가르쳐주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제발 스승님,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전해주십시오”라고 애원했다. 그래도 스승은 거부했다. 제자들은 안 가르쳐주면 스승의 문하를 뜨겠다는 등 강하게 나왔다. 별수 없이 알려주게 되었다. 제자들은 수첩을 가져와서 스승의 말씀을 적기 시작했다. 끝나자 제자들은 열심히 수행하겠다며 하산해서 각자의 길을 갔다.

그 후 제자들의 소식이 궁금해서 찾아다녔다. 한 제자는 그 깨달음의 내용을 책으로 내서 그것으로 먹고살고 있었다. 또 한 제자는 깨달음의 공식을 찾아내 강의를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제자는 그것을 달달 외어서 자기 것처럼 삼고 스승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스승은 이 모습들을 보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와 자신과 제자들이 수행했던 그 선방을 불태워버렸다. 대충 이러한 이야기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가 왜 나왔는가. 비록 비윤리적 언사이지만 이야말로 선의 역설이 아닌가. 이 지구상에 나와 같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나는 이미 천상천하에서 가장 유일한 존재다. 그러니 깨달음 또한 같을 수 없다. 깨침의 길은 사람의 수만큼 다르다. 모든 인간은 불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존재의 방식이 다른 것과 같다. 그것이 진정한 존재의 의미이며, 내가 누구를 닮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스승의 깨달음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스스로 행하지 않고 깨달음의 언설에 집착하게 되면 앞의 이야기와 같은 불행이 일어난다. 자칫하면 스승의 말은 자신의 수행을 죽이는 것이다. 스승을 안내자일 뿐이다.

모파상이 쓴 ‘목걸이’에서 주인공 마틸드는 친구로부터 빌린 진주목걸이를 잃어버린다. 모든 재산을 털어 같은 것을 사주고, 1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한다. 나중에 우연히 만난 친구가 빌려준 목걸이가 가짜라고 말한다. 얼마나 허망한가. 알맹이 없는 말로만 장식된 이 깨달음의 가짜 목걸이를 우리는 목에 걸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깨달음을 수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부처와 조사들의 말씀만 수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눈여래 귀보살’로 자신의 눈과 귀만 호화롭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조계종 선원청규’를 학술적으로 조명하던 날, 그 청규제정을 이끈 의정 스님은 “우리는 처자식이나 부귀영화도 생각지 않으며 일생을 선방에서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고 있다. 불자들이 수십 수백 만 명이라도 불조의 혜명을 잇지 못하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불자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불교의 황금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 불자들 스스로 신행과 일상의 삶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안으로는 치열한 깨달음의 열정을 간직하고, 밖으로는 그 다른 날개인 자비심으로 중생의 고통을 해소하며, 이 사회를 정의와 평화의 불토낙원으로 만든다면 불법을 믿지 말라고 해도 서로 믿을 것이다. 깨달음과 자비실천이 일치되는 종교로서 불교는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원영상 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wonyosa@naver.com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