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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신문왕릉은 어디인가?

기자명 주수완

황복사지 동편 방치된 왕릉터, 신문왕과 연계성 연구 필요

▲ 발굴되기 전의 황복사터.

근래 경주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발굴소식이 전해졌다. 경주 낭산 자락 구황동에 위치한 “황복사지 동편”의 경작지에 방치된 왕릉터에 대한 발굴이었다. 이 터는 일찍이 일제강점기에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주로 발견되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이 발굴된 곳이어서 이후 많은 관심을 받아온 지역이었다.

조사결과 왕릉으로 사용 안돼
알 수 없는 이유로 공사 중단

황복사지엔 삼층석탑만 남아
신문왕 추모 석탑 명문 나와

‘삼국유사’ 기록에 황복사는
의상·표훈 스님과 인연사찰

신문왕릉 조성과정 혼란 주목
공사 중단 원인들 추론 가능

황복사탑 주변 발굴 이뤄지면
왕릉 둘러싼 논란도 해소 가능

그런데 원래 이 십이지상 호석이 발견된 곳은 왕릉과 같은 무덤자리는 아니었고, 인근에 위치한 절터에 속한 건물지, 그중에서도 아마도 금당과 같은 중요한 건물의 기단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건물 기단부에 십이지상이 새겨진 예는 아직 알려진 바 없지만, 그 당시로서는 뒤에 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가 확실하며, 그에 속한 지역이니 그냥 불교건물지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그 건물지의 앞쪽으로는 또 다른 석조건축부재들이 둥그스름하게 널려 있어서 그곳은 건물지 앞에 있었던 목탑지가 아닌지 추정되기도 했다.

▲ 일제 강점기 발굴을 주도한 일본인 노세 우시죠(能勢丑三).

특히 1937년에는 이 절터 인근에서 ‘황복(皇福)’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수습되어 이 절이 황복사가 아닌가 추정되게 되었다. 또한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에는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이 근처에서 수습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들 기와들은 정식발굴에서 출토된 것은 아니어서 이 절터는 ‘구황동사지’, 혹은 ‘전(傳) 황복사지’ 등으로 불리고 있지만, 만약 황복사가 맞는다면 이는 신라에서 매우 중요한 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자못 크다.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 스님께서 19세 때인 644년에 출가한 절이다. 또한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가운데 그 중에서도 특출한 제자였던 표훈 스님이 머물던 곳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때의 일을 전하고 있는데, 황복사에서 탑돌이 의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의상 스님인지 혹은 표훈 스님인지 분명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여하간 이 탑돌이를 주관했던 스님이 공중에 떠서 탑을 돌았고, 그 위신력으로 함께 따르던 무리들도 공중에 떠서 탑돌이를 했다는 기록이다. 또한 이렇게 공중에 떠서 돌기 때문에 탑에 계단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여하간 계단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원래는 계단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라면 아마도 그 탑은 석탑은 아니었을 것 같다. 석탑에는 기본적으로 계단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로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삼국유사’ 속 황복사와는 사정이 다르다. 따라서 원래는 계단이 있어야 하는 탑이라면 기단의 사방에 계단이 놓이는 목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 이 절터에는 석탑만 남아있으니, 만약 십이지상이 새겨진 호석이 둘러진 건물이 금당이라면, 그 앞에 별도로 목탑이 있었을 것을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도 돌이 둥글게 둘러진 형상이어서 팔각형의 목탑으로 보기도 했다.

▲ 황복사지 삼층석탑.

그 후 1942년에는 이 절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위에 봉안되어 있던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사리함 뚜껑에 장문의 명문이 쓰여 있었다. 이에 의하면 이 탑은 신문왕이 692년에 죽자, 왕비였던 신목왕후와 뒤이어 즉위한 효소왕이 신문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석탑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 효소왕은 6살에 불과하여 어머니 신목왕후의 섭정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그리고 이 절이 정말로 황복사가 분명하다면 이 절은 의상 스님이 644년 출가하시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절이었으며 이후 692년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추가적으로 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의상 스님과 표훈 스님이 탑돌이 했다는 목탑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이론적으로는 황복사에 두 기의 탑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절터의 건물지 기단부에 사용된 십이지상 호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현재는 직선의 기단부에 놓여있지만 그 면이 완만하게 휘어있어서 원래는 둥그런 어떤 축대에 놓이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다른 곳에서는 건물 기단에 십이지를 설치한 예가 없기 때문에 이 돌들이 원래는 왕릉에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부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팔각 목탑지 자리가 실은 목탑지가 아니라 바로 왕릉이 있던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 황복사지 석탑출토 사리함 뚜껑의 명문.

즉, 어떤 이유로 왕릉이 폐기되고 나서 거기에 사용되었던 십이지상 부재들을 금당의 기단부에 재사용한 것이 되는 셈이다. 또한 황복사에 신문왕을 위한 석탑이 세워진 이유는 인근에 신문왕의 능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폐기된 왕릉은 신문왕릉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 왕릉은 왜 폐기되었을까? 이에 대해 이 지역이 원래 홍수로 범람이 잦아서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왕릉으로서 유지가 어려워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이 폐기된 왕릉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발굴의 결과는 다소 뜻밖의 결과를 알려주었다. 이 왕릉이 실은 어느 누구의 왕릉으로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굴자는 이를 “가릉(假陵)”으로 불렀다. 임시로 사용된 능 정도로 풀이하면 어떨까. 즉, 이 터는 원래는 왕릉으로 조성을 시작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혀 사용되지 못하고 중간에 공사가 중단되면서, 사용되었던 부재들을 인근 황복사의 건축에 재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용이 중간에 포기된 이유로서 34대 효성왕(재위 737~742)이 죽자 매장을 하지 않고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다”고 한 점을 들어, 원래 효성왕의 무덤으로 사용하려다가 화장과 산골이 결정되면서 왕릉으로서 사용되지 못하고 폐기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추가적인 근거로 지금까지 신라왕릉에 처음 호석이 사용된 예는 제33대 성덕왕릉으로 보고 있었는데, 만약 이 왕릉터가 제31대 신문왕의 능이라면 그보다 앞서 십이지상 호석을 두른 사례가 되는 셈이지만, 십이지상의 양식으로 보면 성덕왕릉의 십이지상보다 앞선 양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성덕왕릉의 십이지상은 부조가 아니라 완전한 입체로 조각된 원각상이다. 대체로 원각상으로 가장 먼저 성덕왕릉에 배치되고, 이후 보다 단순한 부조상으로 배치되는 방향으로 신라 십이지의 흐름을 파악한 것으로 보이며,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추정으로 생각된다.

▲ 최근 발굴된 황복사지 동편 신라왕릉터 항공사진.

그럼에도 ‘삼국유사’를 읽어가면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바로 ‘신주’ 편의 “혜통 항룡” 기사에 등장하는 신문왕릉에 관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신문왕의 사후 능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를 하는데, 인근 ‘정공(鄭恭)’이란 사람 집의 버드나무가 가로막혀 이를 베어버리려고 하자 정공이 “차라리 내 머리를 벨지언정 나무는 벨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노한 효소왕은(아마도 6살의 소년왕이 노했다기 보다는 섭정했던 그의 어머니 신목왕후가 노했다는 뜻이 아닐까) 실제로 정공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후 신문왕릉의 공사가 재개되었는지 어떤 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 물론 아마도 공사가 재개되었기 때문에 별 말이 없었던 것이라 생각은 되지만, 이번 발굴에서처럼 만들다 만 무덤이 나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우선 왕릉을 조성하는데 신하가 나무 한그루 때문에 이를 방해한다는 설정 자체가 특이하다. 물론 ‘삼국유사’는 이것이 정공을 미워한 독룡이 일부러 그 나무에 들어가 정공이 스스로 그 나무를 사랑하게 하여 그토록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복수를 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정공의 버드나무 하나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신문왕의 무덤을 놓고 당시 어떤 모종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설화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비록 정공을 죽이고 그의 집은 완전히 무너뜨려 흙으로 덮어버렸지만, 그리고 아마도 결국 버드나무도 베어졌을 것 같지만, 만약 그 문제가 정공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로서 더 큰 사건으로 확대되었다면 결국 신문왕릉은 조성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정공과 가까웠던 혜통 스님이 결국은 효소왕 일가와 화해를 하게 된다는 내용도 어느 선에서 이 갈등이 봉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텐데, 그것이 혹시 신문왕의 능을 다른데 사용하기로 한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 일반적으로 신문왕릉으로 전해지는 망덕사지 동쪽의 왕릉.

‘삼국유사’를 통한 고대사의 수수께끼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확실한 것은 일단 황복사지 석탑이 신문왕을 위해 세워진 탑이라는 것이다. 만약 황복사 동쪽 왕릉터가 신문왕을 위해 조성되려던 것이 맞는다면 그 근처에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정공의 집과 그가 그토록 아꼈던 버드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절터가 황복사의 터가 맞는다면 의상 스님이 출가하고 제자들과 탑돌이 했던 탑도 그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복사는 유가종 사찰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반해 왕릉 조성을 반대했던 정공과 친했던 혜통은 밀교계 승려였던 것은 이 연결된 사건들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더구나 십이지 호석이 둘러진 건물지는 분명 왕릉이 용도 폐기된 이후에 세워졌을 텐데 그렇다면 황복사가 이때 중창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신문왕을 추모하기 위해 황복사 옆 별도의 공간에 새롭게 건물이 지어진 것이었을까?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이 낭산을 둘러싼 사건들은 우리에게 많은 연구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아마도 황복사탑 주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문제들이 좀 풀릴 것 같지만, 늘 그렇듯 오히려 더 오리무중으로 빠질지도 모른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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