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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연구회 ‘깨달음 논쟁’-1. 인도사상에서의 깨달음 유형

기자명 정승석

불교의 가장 이상적 깨달음은 자신·일체중생 동시 성불

▲ 정승석 동국대 불교학술원장은 “불교는 자리(自利)에 치우치기 쉬운 자유의 폐단을 이타(利他)로 상쇄해 자리와 이타가 함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사진출처='아아, 장엄 불교 2500년'

학술세미나는 전문가들이 특정 주제를 사색하고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는 가장 지적인 자리다. 불교를 주제로 한 학술세미나가 연간 150회에 이르고 이 중에는 흥미로운 주제들도 적지 않다. 불교학연구회가 10월부터 12월까지 3차례에 걸쳐 진행하는 ‘인도‧중국‧티베트불교의 깨달음 논쟁’을 주제로 진행하는 연찬학술대회도 그중 하나다. 법보신문은 연찬학술대회의 내용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불교학연구회의 동의를 얻어 기조강연과 주요 발표문들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진실에 대한 무지가 고통 원인
지혜 없인 해탈 성취할 수 없어
해탈위한 지혜 연마 필요 이유

불교는 자력적 깨달음과 함께
타력 실효성도 조화롭게 도모

인도 사상에서 깨달음은 진리 혹은 진실을 깨닫는 활동이며, 지혜를 통해 얻는 동시에 지혜를 본질로 갖는 것이라는 인식이 통용되어 왔다. 다만 깨달음의 전제가 되는 논의는 흔히 수행론이나 지식론의 범주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보니, 종종 지식과 지혜의 혼용에 대한 개념적 착오를 우려할 수 있다.

“지식이 있으면 앎이 있고, 앎이 있으면 지식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적 명제에 속한다. 그러나 인도 사상에서도 이런 명제가 통용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표현된 명제는 인도 사상(이하 ‘인도철학’)의 목적을 드러내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도철학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명제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지혜가 있으면 깨달음이 있고, 깨달음이 있으면 지혜가 있다.”

이 명제는 인도철학이 해탈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인도철학에서 지향하는 해탈은 학파마다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가능하다. 인도철학에서 깨달음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지혜를 중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시한 두 가지 명제에서 ‘지식’과 ‘지혜’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로는 대체로 즈냐나(jn?na)가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해탈이 궁극적 목적인 경우의 지식(jn?na)은 일상의 경험적 지식에 그치지 않고, 고정관념의 장애가 없이 직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지식을 특정하기 위해 우리는 즈냐나(jn?na)를 흔히 지혜 또는 예지로 표현하길 선호한다. 물론 ‘깨달음의 지식’이라고 표현하더라도 우리는 그 ‘지식’을 맥락상 ‘지혜’라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다.

인도철학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진실에 대한 지식’(=지혜)으로 해탈을 얻는다고 설한다. 이러한 철학은 해탈이라는 종교적 최고의 목적을 추구한다. 아울러 인도철학의 대표적 특징으로 지목되는 것은 세계와 자기(자아, ?tman)에 관한 진실(=진리)을 깨달음으로써 해탈이 성취된다는 신념이다. 이 신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세계와 자아의 본성이라는 진실에 대한 무지는 고통과 속박의 원인이므로, 그 진실에 대한 지혜 없이는 고통과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인도철학의 목적인 해탈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무지[無明]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킬 것이다.

인도철학이라고 말하면 주로 육파철학을 떠올리기 쉽지만 인도철학의 범주에서, 즉 인도 사상에서는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의 경우 오히려 더욱 투철하게 해탈을 위한 깨달음의 길[道]을 모색했다. 불교는 단적으로 말하면 미혹을 전환하여 깨달음을 여는 ‘전미개요(轉迷開悟)의 가르침’으로 불릴 수 있다. 여기서 깨달음은 해탈의 관건이다.

보리수 아래서 성취하여 정각(正覺)으로 불리는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이미 과거의 붓다들이 거쳤던 길이고,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보편적 진리였다. 석가모니에 의하면 보편적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본래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붓다란 그러한 자기를 실현한 사람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깨달음을 모든 사람이 현실적이고 즉시적이며 실증적인 것으로 체득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제 ‘인도철학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 답변은 깨달음의 대상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자아(?tman)로 불리는 자기는 동일할지라도, 이것을 각 학파에서 가르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그 학파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의 대상이 곧 지혜(=지식)의 대상이다. 이 경우의 지혜는 각 학파에서 진실 또는 진리로 설정한 깨달음의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지혜를 얻는 것이 깨달음이며, 이 깨달음은 해탈을 보증한다.

그렇지만 깨달음이 해탈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연마하고 유지하는 노력, 즉 수행이 불가피하므로 깨달음의 문제는 수행도와의 불가분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깨달은 자’의 전형인 석가모니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피할 수 없었듯이, 지혜만으로 고통과 속박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해탈을 추구하는 깨달음은 수행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가 정각을 성취한 이후 각자(覺者, Buddha)로 불렸듯이, 깨달음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불전에서 다양한 수행도를 개진한 것도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함이다.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의 계발이며,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 이 지혜는 깨달음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더욱이 대승불교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을 진여(眞如), 법계(法界), 법성(法性),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등으로도 표현했다. 이처럼 불교에서 깨달음은 다양한 수행론과 교학으로 추구되고 성찰되었다.

일찍이 깨달음의 의미로 가장 널리 통용된 개념은 보리(菩堤, bodhi, 覺)이다. 그러므로 우선 이 개념으로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원론적인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보리는 진리에 눈을 뜬 지혜로써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르게 볼 수 있고, 마음의 어두움이 맑게 걷힌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석가모니는 이 보리를 얻어 역사상 오직 한 사람의 붓다가 되었던 인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붓다가 되기를 추구하는 수행자들도 저마다 보리를 얻을 수 있겠지만, 수행의 정도에 따라 그 보리의 수준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는 보리를 5종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① 발심보리(發心菩堤): 붓다의 깨달음을 구하겠다고 결심한 자가 얻는 보리.
② 복심보리(伏心菩堤): 거칠은 온갖 번뇌를 조복해 수행하는 자가 얻는 보리.
③ 명심보리(明心菩堤): 제불(諸佛)이 노니는 영역에 있지만 아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자가 얻는 보리.
④ 출도보리(出到菩堤): 미세한 온갖 번뇌를 멸하고 미혹의 세계를 떠나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자의 보리.
⑤ 무상보리(無上菩堤): 번뇌의 습기를 단절하여 붓다와 같은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보리.

이처럼 불교에서 깨달음은 번뇌 제거의 수행 수준과 비례하여 심화해 간다. 그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깨달음과 사향사과(四向四果)의 관계이다. 예를 들어 범부의 지위로부터 성자의 지위로 들어가는 견도(見道)의 예류향(預流向)은 초급의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를 일컫는다. 또한 이 경우는 성자의 지위로부터 퇴전하지 않고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정정취(正定聚)로 불린다.

이 같은 깨달음을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심에 의한 수신행(隨信行)이다. 이는 삼보와 성스런 계율에 대해 부동의 청정한 믿음을 확립하는 4불괴정(不壞淨)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4제 등의 교법을 통찰하여 법안(法眼)을 얻는 수법행(隨法行)이다. 예류향으로부터 아라한과까지 사향사과의 성자들은 초급의 깨달음을 심화해가는 수행법으로서 수신행과 수법행 이외에 선정(禪定)을 추가한 세 가지를 채택한다. 석가모니도 아라한과를 깨달은 성자였기 때문에 초기불교로부터 부파불교에 걸쳐 최고의 깨달음은 아라한과였다.

한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은 단기간에 그칠 수 없는 만큼, “깨달음이 어떻게 언제 발생하는가?”라는 문제가 쟁점으로 대두된다. 예를 들어 초급의 깨달음에 관해 예류향에서 4제의 도리를 무루지(無漏智)로써 통찰할 경우, 팔리 상좌부는 한 찰나의 마음으로 일시에 통찰한다는 돈현관(頓現觀)을 주장하고, 설일체유부는 16찰나의 마음으로 점차 통찰한다는 점현관(漸現觀)을 주장한다. 이처럼 깨달음을 얻는 데 필요한 시간과 수행 단계의 측면에서 일찍이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구별이 고려되었다.

이상의 개관으로 깨달음의 유형을 정리해 보자면 크게 타력적인 것과 자력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얼핏 보기로 정통 학파의 경우는 타력적 유형, 비정통 학파의 경우는 자력적 유형에 속할 듯하다. 그러나 정통 학파에서 상키야와 요가는 원칙적으로 자력의 깨달음을 추구하며, 특히 상키야는 철저한 자력주의를 지향한다. 인도 사상 전체에서 자력에 의한 깨달음을 추구하기로는 상키야가 첫째로 꼽힐 만하다. 깨달음의 자력주의를 지향하는 다음 순서로는 자이나교, 그 다음으로는 요가와 불교를 동렬로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의 불교는 대승의 타력 신앙을 포함하지만, 대승 이전의 불교를 고려한다면 상키야보다 앞서는 순서가 될 것이다.

정통 학파에서 타력의 지향성은 미망사, 베단타, 바이셰쉬카, 니야야의 순서로 열거할 수 있다. 다만 베단타의 경우, 자력의 지향성을 드러내는 일파가 있지만, 브라만에 신격을 부여하는 전반적 기조로 보면 베다의 제식주의에서 크게 일탈하지는 않는다. 불교는 자력에 의한 깨달음의 성취를 원론으로 표방하면서도 타력의 실효성도 고려하는 방향으로 조화를 도모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를 해탈이라거나 열반, 또는 이것들에 상당하는 동의어로 표현한다. 이 중 해탈과 열반이 가장 보편적인 표현이다.

▲ 정승석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해탈은 자유, 열반은 평등 혹은 평화의 의미를 지닌다. 자유는 문화적 가치, 평등은 종교적 가치에 속한다.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적인 평등은 상반하는 듯하지만, 불교는 깨달음을 개인과 사회 속에 실현하길 추구했기 때문에 해탈과 열반이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자리(自利)에 치우치기 쉬운 자유의 폐단을 이타(利他)로 상쇄하여 자리와 이타가 함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깨달음은 자기의 성불과 일체중생의 성불이 동시에 완성되는 것이다.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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