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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한니발의 의지의 방향

“나와 비교할 장수는 이 세상에 없다”

▲ 그림=근호

기원전 218년 5월,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당시 유럽의 최강국이던 로마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카르테헤나를 떠났다. 그는 에브로 강을 건너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현재의 스페인) 갈리아 지방(현재의 프랑스)을 횡단했다.

유럽 최강국 로마 정벌한 한니발
병사들과 같은 조건서 동고동락
강한 의지로 수많은 승리했지만
진정한 전쟁터는 내면에 있는 것

29세의 장군이었던 그가 거느린 군대는 2만6000명이었다. 그는 이 적은 병력으로 동원 가능한 군대가 75만명인 로마를 침공하기 위하여 여러 나라와 험준한 산악, 늪지대와 안개 자욱한 숲을 통과해야 하는 대장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서남쪽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해 있는 카르타고에서 로마를 공격하려면 해군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진격하는 편이 쉽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남쪽과 동서쪽은 강력한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로마의 북쪽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북쪽으로 진격하자면 해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는 것에 비해 서너 배가 넘는, 또한 강과 산맥을 건너고 수많은 이민족의 저항을 돌파해야 하는 엄청난 난관이 그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30마리의 코끼리가 포함된 군대를 이끌고 행군했다. 그는 알프산을 넘었다. 산을 넘는 동안 그는 일개 병사와 마찬가지로 꽁꽁 언 밥을 먹고, 가파른 낭떠러지의 틈새에서 잠을 잤다. 그는 카르타고를 출발한 이후 도중에 증강하여 4만6000명에 이르렀던 병사 중 2만 명을 알프스산에서 잃었다. 

 로마에서는 집정관 코르넬리우스에게 북쪽으로 나타난 뜻밖의 적을 막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를 상대하게 된 한니발은 사기 진작을 위해 포로로 잡은 갈리아인들을 한가운데에 세우고 자기 병사들을 그 주위에 둥글게 세웠다.

한니발은 갈리아 포로들의 포박을 풀어준 다음 말했다.

“결투를 벌여 이기면 살려 주겠다. 무기와 말을 주고 자유까지 주겠다.”

이에 갈리아인들은 저마다 결투사가 되기를 원했고, 마침내 생사를 가르는 결투가 벌어졌다. 카르타고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치고받는 갈리아인들을 구경하는 사이에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결투가 끝나자 한니발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방금 본 것은 구경거리가 아니다. 이 갈리아인들이 처한 상황이 곧 그대들이 지금 처한 상황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도망칠 곳이라곤 없다. 앞에는 포 강이, 뒤에는 알프스가 가로막고 있다.

그대들에게는 로마인들을 무찌르고 돌파하느냐 패하여 죽느냐는 두 길밖에 없다. 그대들이 승자가 된다면 그대들에게는 불사신조차도 바랄 수 없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로마는 넓은 땅을 속국으로 지배하고 있다. 로마를 이기면 그것이 모두 우리 것이 된다. 나는 그것을 그대들에게 모두 나누어 줄 것이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다. 우리에게는 고생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앞으로의 고생은 지금까지의 고생과는 다르다. 보수가 기다리고 있는 고생! 여러분 앞에는 눈부신 황금이, 아름다운 여자가, 고귀한 신분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적장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냐? 나는 전쟁터에서 태어나 숙영지에서 자랐다. 또한 천하의 용장 하밀카르가 나의 아버지이다. 그런 나에게 비교될 수 있는 장수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나는 그것을 대군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으로써 이미 충분히 증명했다.

이 전쟁은 반드시 우리가 이긴다. 전쟁에서 이기면 그대들에게 에스파냐와 이탈리아를 상으로 주겠다. 세금은 자식 대까지 면제하겠다. 금화를 원하면 금화를 주고, 노예로서 싸움에 참가하면 카르타고 시민권을 주겠다.”

병사들이 내지르는 우레 같은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고, 한니발은 그 전투에서 이겼다. 그다음 전투에서도 한니발은 또 이겼다. 적군 2만명이 희생당한 데 비해 자신의 군대에서는 전사자가 거의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다음 해, 한니발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었다. 기원전 217년 4월 한니발은 트라시케노 호숫가에서 2만5000명의 로마군과 싸워 1만7000명을 전사시켰다. 겨우 전장을 빠져나간 로마군도 대부분은 도중에 죽었기 때문에 실제로 살아서 로마까지 돌아간 로마군은 2000명에 불과했다. 한니발 쪽의 손실은 2000명이었다.

카르타고와 로마가 국운을 걸고 맞붙은 전투는 네 번째인 칸나에 회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5만 명의 병력으로 8만7000명의 로마군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로마 측 희생자는 7만인데 비해 카르타고 측의 희생자는 5500명에 불과했다. 전술적인 면에서도 한니발의 승리로 끝난 그 전투는 전생사에 남는 중요한 전투로 꼽히고 있다.

매우 어려운 환경을 견뎌내면서도 한니발의 병사로서 그를 배신하고 떠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가 지휘하고 있는 군대는 아프리카인과 에스파니아인, 갈리아인들로 구성된 혼성군이어서 이민족인 병사들끼리는 말조차 통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는 과묵했고, 병사들을 매우 아꼈다. 한니발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추위도 더위도 묵묵히 견뎌내었다. 병사들과 동일한 거친 음식을 투정없이, 그것도 배가 고플 때만 먹었다. 잠 또한 잠자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꼭 잠을 자야 할 때만 잤다. 처리해야 할 일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일을 먹는 것이나 잠자는 것보다 우선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잠은 그에게 포근한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성문 네 곳에서 병들고, 늙고, 죽는 사람과 수행승들을 본 다음 보장되어 있는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감행한다. 이에 대해 싯다르타 태자가 약소국으로서의 조국의 운명을 비관하여 출가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후 6년간 계속된 고행으로써 증명된다. 싯다르타 태자가 그렇듯 비관적이고 패배적인 마인드를 가졌었다면 엄청난 고행을 견뎌낸 다음 인류 역사상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지고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의 강인한 고행은 알프스산을 넘어 로마와 대적하는 한니발의 강인한 의지를 연상시킨다. 다만 그 의지가 나아가는 방향에 있어서 둘은 백팔십도 다르다.

남을 복속시키기 위한 의지와 자신을 이기기 위한 의지. 남의 것을 빼앗고자 하는 의지와 자신의 탐진치를 소멸시키고자 하는 의지. 두 의지 중 하나는 사람들을 피와 눈물과 비탄의 결말에 이르게 하고, 다른 하나는 고요와 평화와 행복의 결말에 이르게 한다. 삶은 날마다 전투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전투는 내면의 전장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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