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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은 또 다른 깨달음

기자명 광전 스님

가을이 한껏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나뭇잎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가고 성질 급한 나뭇잎은 벌써 낙엽이 되어 거리를 뒹군다. 벌써 올해도 달력이 두 장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쉬이 피로해지고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서글프지만, 그보다 기억력이 감퇴해 전화번호를 외울 때 앞에 번호를 외우면 뒷 번호가 생각나지 않고, 뒷 번호를 외우면 앞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걸 보면서 이만 저만 서글픈 게 아니다.

흔히 기억은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반면 망각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또 기억과 관련된 단어는 매우 창의적으로 여겨지는 반면 망각에 관한 단어는 대개 수동적이며 노화현상의 결과 내지는 뇌기능의 퇴보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망각은 생각 외로 우리생활에 꼭 필요하며 오히려 유용하기까지 한 부분이 있다.

세계적인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경우를 살펴보자. 어느 날 기차를 탄 아인슈타인은 역무원이 차표를 검사하러 다가오자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가방까지 뒤져도 차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아인슈타인을 알아본 역무원이 차표가 없어도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차표를 꼭 찾아야 한다고 우겼다. 역무원이 재차 말리자 아인슈타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차표를 찾아야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단 말이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집으로 가는 길을 종종 잊어버려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곤 했다. 또한 자기집 전화번호도 평생 외우지 못해 어쩌다 집에 전화를 걸려면 전화번호부에서 자기집 전화번호를 찾아야 했다. 이렇듯 모든 것을 잘 기억할 것 같은 천재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못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창의력은 세상을 놀랍도록 변하게 만들었다.

가령 내가 지하주차장에 가서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찾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때 갑자기 지난 몇 년간의 주차 장소가 마치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서 기억난다면 난감하지 않을까. 오늘 주차한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과거 어디에 주차했는지는 지워버리는 게 유리하다는 의미이다. 또 살면서 슬픈 일, 창피했던 일 등이 누구나 있기 마련인데 그 생각이 머릿속에 항상 기억된다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의 모든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히 기억하고 있다면 인간은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즉, 망각은 매우 정상적인 정신작용이며 반드시 필요한 정신작용이기도 하다. 미국의 소설가 숄렘 에쉬가 ‘우리 실존의 필수 조건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는 것’이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건망증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한 기억의 취사선택 과정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기억과 행동을 조절하는 뇌 측두엽의 해마는 유용한 기억들만 남기며 불필요한 단순 기억은 버리는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건망증은 해마에 중요한 정보가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맥락에서 건망증은 오히려 뛰어난 지능의 반증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주장이다.

현대처럼 근무시간이나 보고서 같은 측정 가능한 결과물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몽상이나 사색이 지극히 비생산적인 것으로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행동이 실은 가장 생산적인 행동일 수 있다. 가득 채우는 것보다 때때로 비우는 것이 우리의 삶과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지 모른다.

망각같이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그대로 사실은 우리에게 완전한 모습일 수 있다.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이 사바세계를 떠나 극락정토가 따로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처럼 말이다.

이 맑은 가을 날, 망각은 또 다른 이름의 깨달음이 아닐까?

광전 스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chungkwang@yahoo.com


[1414호 / 2017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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