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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초기불교와 정토신앙

“세상일은 헛되고 부처만이 참되다”

이제까지 저는 몇 통의 편지에서 과연 극락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 말씀드려왔습니다. 그 문제가 현대인들에게 정토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벽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의 저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역시 그 책의 ‘사문 법장’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현대인의 극락에 대한 인식문제는
정토신앙 갖지 못하도록 하는 ‘벽’
초기불교가 있기에 정토신앙 존재

‘나’라고 하는 것 없다는 게 불교
그래서 이해하기도 믿기도 어려워

무아 가르침 초기불교 핵심 사상
대승경전에서도 무아 사상 반복
초기불교·대승불교는 모두 ‘일음’

“여기서 자주 질문을 받는다. 법장보살은 가공의 인물이 아닌가? 그런 보살을 묘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면, 미타라 하고 정토라 하는 것이 무슨 확실성이 있는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나무아미타불 91쪽)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여래장, 불성사상의 입장에서 이루어졌음을 앞의 편지에서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현실의 ‘역사’보다는 그 현실의 역사 뒤에서 존재하면서 작용하는 ‘법’이 더욱 진실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는 우리의 사색을 요구하는 또 다른 힌트를 하나 더 제시합니다. “다만 상식에 머무르지 말고 조금 더 깊게 파고들면 어떨까”(92쪽)라고 전제한 뒤 일본불교에 기초를 쌓았다고 평가되는 쇼토쿠(聖德) 태자의 말을 하나 인용합니다. “이 세상일은 헛되고 임시적이며, 오직 부처만이 참되다(世間虛假, 唯佛是眞)”(92쪽)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뒤이어 ‘야나기 무네요시’는 여래장, 불성사상으로 언급을 옮겨 갑니다. 그 역시 타당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초기불교와 관련지어서 좀 더 사색해 보고자 합니다. ‘세간허가’라는 말이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으로 이야기되는 삼법인(三法印)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초기불교 경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옵니다.

“색(色)은 무상한가, 무상하지 않은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가, 괴롭지 않은가?”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무상하고 괴로운 것에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색만이 아니라 다시 수(受), 상(想), 행(行), 식(識)에 대해서도 묻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대답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상하고 괴롭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무아)을 삼법인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법인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확실히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은 무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고를 거쳐 마침내는 무아로 모아집니다. 그런데 이 무아를 대승불교에서는 무엇이라 말할까요? 공(空)입니다. 무아가 곧 공이며 공이 곧 무아입니다. ‘금강경’의 경우에는 비록 ‘공’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무아를 말하는 초기불교를 동어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아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무상(無相)이라는 말은 나오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만 사실은 모두가 동의어입니다. 같은 개념을 가리키는 다른 말일 뿐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고 다르게 말한 것 뿐입니다. 말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네 가지 상이 다 없다고 하는 무상(無相)이라는 것은 바로 무아라는 말이 됩니다.

이쯤 되면 손들고 질문하는 분이 나타납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 그렇게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무아라니? 내가 없다니? 그럼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구이며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또 누구라는 말인가?” 이렇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글을 쓰는 저도 존재하고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우리가 소박하게 생각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나’라든가, ‘세계’라든가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교는 그렇게 존재하는 나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앞에서 인용한 부처님의 질문, 즉 초기불교의 가르침(‘잡아함경’)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무상, 고 그리고 무아라는 삼법인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 지구이고 이 사바세계입니다. 이 점을 쇼토쿠태자는 ‘세간허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간은 헛되고 임시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극락과 같은 세계, 즉 정토삼부경에서 이야기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다만 이야기라고만 말하고 마는 이유가 정작으로 우리 자신은 확실히 존재하며, 이 사바세계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나 자신이 무상하다는 것은 나 자신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범주(오온 五蘊)가 하나하나 다 무상하다는 것으로 증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이 그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대승불교에 오면 가장 단적으로 ‘반야심경’에서는 “다섯 가지 범주가 다 공하다(五蘊皆空)”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초기불교라고 하고 그 핵심이 무아라고 하며, 대승경전(특히 반야부경전)에서도 그러한 입장이 반복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반야부)는 일음(一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일음교’라는 관점이 그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제 우리는 적어도 현실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존재와 사바세계의 존재를 어느 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거나 느끼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적인 너무나 불교적’인 입장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불교적인 너무나 불교적인’ 입장에 설 수 있다면, 즉 우리 자신은 존재하지 않으며(人無我 我空) 우리 자신을 싣고 있는 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法無我 法空)고 인식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간이 헛되고 임시적인 것이라 인식할 수 있다면, 저 정토삼부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극락세계는 오히려 존재한다고, 그러한 이야기만이 오히려 영원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쇼투쿠 태자가 말한 ‘유불시진(唯佛是眞)’이 그런 뜻이라 생각됩니다. 이리하여 드디어, 저는 안심하고 정토문의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있게 되었습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14호 / 2017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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