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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잭과 콩나무 ②

기자명 김권태

사고를 형성하는 언어가 곧 자기자신

“잭, 이 소도 더는 젖이 나오지 않는구나. 이제 빵을 살 돈도 없고, 우리에게 남은 건 이 소 한 마리뿐이니, 시장에 나가 소를 팔아 오너라.”

부정적 표현은 자아 발달 연결
자의식 바탕해 심리·현실 구분
기억 발달과 더불어 자아 유지

엄마와 단 둘이 살던 소년의 집에 유일한 생계수단이던 젖소의 젖이 말랐다. 엄마는 이제 쓸모가 없어진 젖소를 돈으로 바꿔오라고 말하고, 소년은 한 노인을 만나 돈 대신 마술콩으로 바꿔가지고 돌아왔다. 이는 젖을 주며 나의 생존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하던 ‘엄마-나’의 이자관계에서 돈이라는 상징과 마술콩이라는 환상이 필요한 ‘엄마-아빠-나’의 삼자관계로의 전환을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언어’와 ‘상상력’이다. 말하지 않아도 내 욕구를 채워주던 시절이 끝나고, 이제는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 타인과 보이지 않는 마음을 주고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를 바탕으로 나만의 마음공간에서 상상의 그림을 그리며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해소해야 한다.

언어는 사고를 형성한다. 언어가 곧 생각이며, 생각이 곧 나 자신이다. 아이들은 울음으로 의사를 표현하다가 차츰 소리반응과 옹알이, 동물울음소리, 엄마·아빠 단어와 사물의 이름을 배워가며 의미와 언어를 익힌다. 토막 단어의 나열에서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문장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어느 순간에는 ‘나’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세상과 나의 구분이 흐릿한 꿈을 꾸는 듯한 의식에서 깨어나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자각했다는 뜻이다. 이 시기 직전에는 “아니야” “싫어”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써대며, 타인과 자기를 분리하고 경계 짓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라는 말을 쓰면서도 긍정적인 말에는 대부분 ‘자기의 이름’을 붙여 말하고(“ㅇㅇ가 할거야, ㅇㅇ가 그랬어”), 부정적인 말에는 ‘나’라는 말을 붙여 말한다(“내가 안 그랬어” “나 하기 싫어”). 부정적 인식과 표현은 곧 나와 사물의 차이를 알아간다는 뜻이며, 이는 독립된 자아의 발달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차츰 긍정적인 말에도 ‘자기 이름’ 대신 ‘나’라는 말을 쓰고, ‘나’라는 말이 자유로워진 후에는 대개 1년 쯤 지나 ‘너’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물과 같던 타인이 나와 비슷한 한 주체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며,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자각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때는 친구들과 이유 없이 싸우고 모든 물건을 자기 거라고 고집하던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친구에게 자기 장난감을 나눠주기도 하고 우는 친구를 안아주며 달래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아니야→나→너’의 단계로 유일무이한 ‘자아(ego)’를 획득하고, 이 자의식을 바탕으로 심리적 현실과 객관 현실을 구분하며 자신의 경험을 응집하고 통합하는 것이다. 또 기억의 발달과 더불어 자아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며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것이다.

자아가 생긴 아이들은 유난히 “심심해” “놀고 싶어”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를 직접 구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아이의 내면에서 놀이가 발생했다는 뜻이며,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식불교에서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표상화되어 식물의 씨앗처럼 잠재력으로 남는다고 말한다. 특히 언어와 관련된 잠재력을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말하며, 이것이 마음의 모든 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경험들은 모두 마음에서 표상화되고, 또 표상된 마음은 종자로 남아 언어와 자의식을 통해 한 생각 마음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의 종자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보는 주체를 자아로 삼아 하나의 심리적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대상과 주체가 실체 없음이라는 결론적 자각이 아니라, 그러한 자각에 이르기까지 표상과 언어와 자의식이라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져있거나 결핍이 있으면 나와 세계가 ‘오직 마음(唯識)’이라는 자각과 ‘대상과 주체가 실체 없다(無我)’는 자각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권태 동대부중 교법사 munsachul@naver.com
 


[1414호 / 2017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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