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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첫 서리가 내린 날

기자명 최원형

생명 바라보는 시선에 평등한 마음 깃들려면

도시의 동물들 고난 시작될 겨울
그들도 평등하게 생존할 권리 있어
고통 공감해 덜어주려는 자비심 필요

해가 뉘엿뉘엿 저물던 시각 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자료를 찾아 나오다 검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벤치 뒤에서 까만 눈만 내밀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길고양이였다. 언뜻 봐도 새끼 고양이였다. 오가는 사람들 발길 너머로 뭔가를 살피는듯하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자 얼른 덤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양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람 발길이 뜸해지자 고양이는 내가 처음 눈동자를 발견했던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계속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소방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지켜보던 나와 고양이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어봤다. 고양이가 나를 발견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경계를 늦춰도 될 만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미동도 않고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오히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를 보다가 내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시선을 따라 옮겨간 이들 가운데는 고양이를 발견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 보였다. 그들은 잠깐 머물던 시선을 이내 거두고는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연유에서 그곳에 숨어 바깥세상을 살피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평소 동물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더구나 털 달린 짐승은 만지지도 못한다. 다만 그들도 우리와 평등하게 이곳에서 생존할 권리가 있기에 만나면 인사를 나누긴 한다. 마음속으로 때론 소리 내어 그들의 안위를 기원한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도시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갈 거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따금 그들의 모습은 내게 진한 슬픔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특히 기온이 뚝 떨어지기 시작하는 이맘때면 더욱 그렇다. 문득 가방 안에 빵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사람이 먹는 걸 고양이에게 주면 안 된다고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런데 춥고 어두워질 무렵인지라 혹시 저 고양이가 배가 고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빵을 하나 던져줬다. 던져주기 전에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고는 빵을 들어서 한번 보여준 뒤 던졌다. 빵이 떨어지자마자 휙 하고 사라지더니 잠시 뒤 다시 와서 냄새를 맡고는 물고 갔다. 그렇게 검은 눈동자와 나의 짧은 만남은 끝났다.

그날은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올 들어 첫 서리가 내린 날이었다.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니 텃밭에 있는 배추들이 하얗게 서리를 이고 있었다. 이제 동물들에게는 고난의 시작이다. 기온은 더 곤두박질 칠 테고 꽁꽁 얼어붙는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먹이구하는 일은 또 얼마나 심난할까 싶기도 하다. 차가운 콘크리트가 대부분인 도시에서 동물들의 겨울나기가 어느 정도로 힘겨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학창시절에 기독교는 사랑, 불교는 자비라고 배운 때문인지 불교하면 자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사실 불교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공의 개념이 더 명징할 테지만 자비가 대명사처럼 돼버린 것은 비교적 이해가 쉬운 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책에선가 이 자비의 뜻을 설명해 놓은 걸 읽고 나서야 자비에 담긴 뜻을 조금 더 깊이 헤아리게 됐다. 자비란 친구의 고통이나 슬픔을 공감하고 그것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뜻한다고 했다. 여기서 친구란 가까운 인연일 수도 있겠지만 확장하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뭇 생명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사실 뭇 생명 하나하나와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뭇 생명의 고통이나 슬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덜어주려는 마음이야 말로 자비의 마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뭇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에 평등한 마음이 깃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나와 친밀도가 있는 생명과 그렇지 못한 생명을 대하는데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자비라고 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나와 가까운 인연들에 대한 마음은 자비가 아니라 그저 집착일 수 있다. ‘공감에 반대하다(against empathy)’를 쓴 예일대 심리학교수 폴 블룸이 말한 ‘좁은 초점’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개인에게 공감이 작동하게 될 때 발생하는 오류를 그는 좁은 초점으로 표현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공감이 작동하게 되면 편파적일 가능성이 높으니 결국 중요한 것은 평등한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전혀 무관한 생명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 그게 바로 자비다.

그날 오후에 만났던 어린 길고양이는 그 후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모든 생명가진 이들이 다가오는 겨울날들을 무사히 날 수 있기를 가득한 자비의 마음으로 발원할 뿐이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14호 / 2017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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