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월악산 신륵사-영봉-마애불-덕주사
65. 월악산 신륵사-영봉-마애불-덕주사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7.11.1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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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설움 삼키고 불심으로 새긴 ‘덕주 마애불’ 만추에 젖다

▲ 신라의 마지막 공주였던 덕주 공주가 조성한 마애불(보물 406호)이다. 이 마애불은 마의태자가 세운 미륵세계사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과 마주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최고봉(最高峰)을 ‘영봉(靈峰)’이란 칭한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뿐이다. 백두영봉이 자아내는 신비로운 기운은 이미 정평 나 있지만 월악영봉 또한 웅혼함과 장대함을 간직하고 있어 ‘신령스런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 맞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영봉은 신륵사, 덕주사, 보덕암 세 절을 품고 있다. 어느 절에서 영봉을 오르느냐에 따라 마주하는 풍광 또한 다르다.

신륵사 극락전 벽화서 마주한
마명 법력·혜가 열정에 감탄

신륵길, 깊은 산 맛의 ‘선정 길’
보덕길, 험준·고준의 ‘두타 길’
덕주길, 계곡·기암의 ‘자비 길’

덕주 공주 마음 담은 마애불
마의태자 석불과 마주해 애잔


신륵사에서 발을 뗀 순간 험준한 산길뿐이다. 청량한 계곡의 물소리나 오붓한 오솔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도반이라 하면 이따금씩 정적을 깨주는 바람 소리 뿐이다. 그 대신 이 길은 산의 깊은 맛을 선사한다. 하여 ‘선정(禪定)의 길’이라 부르고 싶다.

보덕암에서 오르면 가파른 된비알을 넘어서야만 한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통해 달(月)과 산(山) 사이에 왜 ‘악(岳)’자가 들어섰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 대신 이 길은 산과 호수가 빚어내는 최고의 경관을 선사한다. 하여, ‘두타(頭陀)의 길’이라 명명하고 싶다.

▲ 신륵사 3층석탑(보물 1296호).

덕주사에서 산행을 시작한 사람에게 고행이란 없다. 나뭇잎 하나, 구름 한 점까지 그대로 담아내는 계곡은 기암괴석들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걸어서 오른 만큼 산은 그 높이에 상응하는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신륵사와 보덕암이 간직하고 있는 고즈넉함과 절경을 절묘하게 빚어 놓고 있으니‘자비의 길’이라 하겠다.

새벽 4시께 월악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신륵사 일주문으로 향했다. 고요한 가을 새벽 구름 사이로 내민 보름달을 도반삼아 걷기에는 ‘선정의 길’이 안성맞춤이다. 극락전 벽화에 나툰 선사들로부터 한 말씀 듣고 산을 오른다면 금상첨화 아닌가.

▲ 영봉 앞에 펼쳐진 이른 아침의 월악능선.


신륵사 극락전은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내용의 벽화를 품고 있다. 장수, 부귀, 복록 등을 주제로 한 그림이 대부분이지만 중국 고사나 소설의 내용을 소재로 한 그림도 있다. 또한 탱화에서 볼 수 있는 도상이나 선종의 계보를 이은 조사들의 일화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선조의 명을 받고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온 사명대사의 행적을 그린 ‘사명대사행일본지도(泗溟大師行日本之圖)’가 그려져 있는데 사명대사의 행적을 그린 사찰벽화로는 유일하다.

이처럼 다양한 주제들이 신륵사 벽화에 새겨진 연유는 무엇일까? 신륵사 극락전 벽화를 연구한 배진석 선생은 논문 ‘제천 신륵사 극락전 단청문양 및 벽화 연구’를 통해 이렇게 피력했다.

“신륵사 극락전 벽화에 표현되어 있는 다양한 내용들, 어쩌면 사찰과 관련 없는 것 같은 이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여유와 해학을 주기 위한 화원의 재치이기도 하며, 또 일반 대중이 사찰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해주고 있다.”

▲ 오른쪽 거대한 바위가 월악산 영봉이다.

절에 들어서며 사천왕에 예를 올리려 하는데 아니 계시다. 어디 가셨나? 달빛 머금고 고고하게 서 있는 탑에 합장 하고 극락전으로 향했다. 아뿔싸! 극락전이 없다. 전각을 떠받들고 있던 기둥만 어둠 속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해체복원 불사가 한창 중인 것이다. 이 사실 사전에 인지했다면 ‘보덕암-덕주사’ 코스를 택했을 터인데. 나그네의 낙심을 위로해 주는 건 하늘에 떠 있는 달 뿐이다.

월악산 동쪽에서 떠 오른 달이 영봉에 걸리면 한 폭의 동양화처럼 환상적이다. 그래서인지 월악산(月岳山)의 월(月)을 ‘달’로 보고 ‘산에서 노니는 달’ 등으로 해석하는 이가 꽤 많다. 그런데 연원을 살펴보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 산이 ‘월악’으로 불린 건 고려 때고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월형산(月兄山)으로 불렸다. 신라시대에는 산을 ‘달(達)’이라 하기도 했는데 그 ‘달’을 한자 ‘월(月)’로도 표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월(月)도 산이고 악(岳)도 산이니 ‘월악산’은 ‘뫼뫼뫼’요 ‘산산산’이다. 

신륵사 극락전 벽화 중 매우 인상적인 벽화 2점이 있다. 극락전 내부 동쪽 벽 왼쪽 제일 윗부분에 풀로 엮은 자리에 앉아 있는 노승이 있었다. 부처님의 행적을 최초로 기록한 ‘불소행찬(佛所行讚)’과 전국의 강원에서 필수과목으로 선택하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저술한 인도 마갈타국의 마명(馬鳴) 스님이다. 그런데 왜 ‘말 울음소리’ 마명(馬鳴)일까?

북인도 월지국의 왕 가니색가(迦尼色迦)는 2세기 중인도를 정복할 당시 마갈타국을 손에 넣고는 전쟁 배상금 대신 마명 스님을 데리고 귀국했다. 금은보화는 없고 승려 한 명만 보이자 월지국 대신들은 불만에 가득 찼다. 이를 눈치 챈 왕은 마명 스님을 마구간으로 데리고 가 이른다

“큰 법력을 지닌 마명 스님. 저 축생들도 알아듣는 설법을 해보시라!”

▲ 영봉에서 덕주사로 내려오는 길에서 마주한 풍광.

이내 마명 스님의 법설이 마구간을 가득 채워갔다. 그러자 말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대승불교의 시조로 추앙받는 마명 스님은 마명존자, 마명보살로 추앙받고 있다. 마명보살이 남긴 게송이 있다.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본래의 법이요, 밝고 어둠 또한 원래 둘이 아니다. 지금 깨달음의 법을 부촉하니, 취할 것도 아니고 떠날 것도 아니다.(隱現卽本法 明暗元不二 今付悟了法 非取亦非離)”

다소 어려워 보이나 법(法)을 마음(心)으로 대치하면 나름의 갈무리가 있을 터다.

외부 서쪽 벽 왼쪽 상단에 그려져 있던 그림은 ‘혜가대사 팔을 자르다’ 의미의 혜가대사단비도(慧可大師斷臂圖)다. 

▲ 하덕주사 대웅전 곁에 말뫼산이 멋지게 서 있다.

중국 대륙을 주유하며 법을 찾아 나선 신광(神光)의 발길이 소림사에 닿았다. 인도에서 건너 온 달마에게 법을 청했으나 달마는 벽만 보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혹한 속 눈보라가 치던 날 신광은 구도심의 증표로 왼팔을 잘랐다. 달마가 돌아 앉아 물었다.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편치 않은 그 마음을 가져오라!”
“찾아보니 없습니다.”
“그대의 마음은 편안해졌노라!”

이 법거량으로 신광은 달마의 법을 이었다. 중국 선종의 2조 혜가대사(慧可大師)다. 벽화는 그 때의 일대사를 그려놓은 것이다. 2018년 가을이면 두 벽화 다시 한 번 온전히 감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하덕주사 계곡도 만추에 젖어가고 있다.

높이 150m, 둘레 4Km의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나타났다. 영봉이다. 하루의 첫 해를 품은 영봉이 밤새 머금었던 이슬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 풍광은 정말이지 신령스러웠다. 운무 사이로는 만수봉(萬壽峰, 983m), 하설산(夏雪山, 1028m), 어래산(御來山, 815m), 다랑산(多郞山, 591m), 신선봉(神仙峰, 967m) 등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첩첩하게 펼쳐져 있다. 그야말로 ‘뫼뫼뫼’요 ‘산산산’이다. 영봉에서 덕주사로 내려오는 길에서 만나는 경치 또한 일품이다. 암벽을 뚫고 솟아난 소나무들이 즐비하고, 산길을 크게 돌 때마다 영봉은 오묘하게 다가온다. 산이 놓지 않은 11월의 단풍마저 만끽할 수 있으니 더 없이 좋다. 그 길에서 신라의 마지막 공주이자 훗날 마의태자(麻衣太)라 불린 김일태자의 여동생 덕주(德周)를 만났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할 때 김일태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천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 나라의 존망이 하늘에 달려 있다 하지만 충신, 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지키다 힘이 다한 후 그만 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경순왕이 끝내 나라를 고려에 내놓자 김일태자는 덕주공주와 함께 하늘재를 넘었다.(법보신문 1358호, ‘길 따라 절에 들다 40회’ 참고) 김일태자는 현 미륵세계사 자리에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을 세웠고 월악산으로 들어 간 덕주공주는 지금의 상덕주사에 마애불(보물 406호)을 새겼다. 석불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고, 마애불은 남쪽을 응시하고 있다. 마애불과 석불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나라 잃은 설움을 법음(法音)에 기대 달래가던 오누이가 그려진다. 그래서일까! 만추 속 마애불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신륵사. 신륵삼거리까지의 2.8Km 구간은 오르막이지만 급경사는 아니다. 신륵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영봉으로 향하고, 왼쪽으로 들어서면 덕주사로 향한다. 영봉에서 보덕암으로 바로 내려갈 수도 있다. 덕주사로 가려면 반드시 신륵삼거리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덕주사에서 신륵사로 가는 980번 버스가 있다. 덕주골 정류장에서 승차 해 광천정류장에서 하차한 후 1.8Km 걸어가면 신륵사다. 풍광을 고려하면 ‘보덕암-덕주사’ 코스가 좋다. 이에 비해 ‘신륵사-덕주사’코스는 오르기가 수월하고 조용하다. 어느 코스를 선택하든 영봉을 경유할 경우 등하산 시간은 6시간을 잡아야 한다.

 


이것만은 꼭!

 
덕주사 석조여래입상: 원래는 정금사터에 있었던 불상이다. 충주댐 건설 때 덕주사로 이운(1983년 4월)했다. 전체적으로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지만 풍만한 상호를 갖췄다. 고려후기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196호 지정돼 있다.

 

 

 

 

 

 
덕주사 대불정주범자비: 통일신라 명찰로 알려진 월광사 터 입구 논둑에서 발견된 비를 1988년 2월 덕주사로 옮겨와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비문 첫줄에만 ‘대불정주(大佛頂呪)’라 새겼고 다음 줄부터는 모두 범자로 새겼다. 글자 수는 모두 105자로 추정하고 있으며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의 ‘능엄주’가 새겨져 있다. 현재 남한에서 범자비는 덕주사 대불정주범자비가 유일하다.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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