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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김호성의 정토행자 편지
의상 스님의 화엄경“허구에 입각해 진실을 말합니다”
김호성 교수  |  lokavid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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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14  1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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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편지에서도 의상(義相) 스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다시 한 번 의상 스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의상 스님은 모두 아시겠습니다만 당나라 유학을 했습니다. 장안(지금의 서안)의 남쪽에 있는 종남산이라는 산에서 스승 지엄(智儼) 스님을 모시고 ‘화엄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그 당시 의상 스님께서 읽으셨던 ‘화엄경’은 60권본입니다.

당 유학 중에 지엄 스님 은사로
60권 읽고 요약한 법계도 펴내

210자 글자 정사각형 도형으로
돌고 도는 굴곡형태 모두 54각
53선지식 만나서 성불하는 내용

그림과 함께 시에 의지한 것은
허구 입각 진실 드러내기 위함
주석 끝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


오랜 유학생활을 마칠 때쯤 ‘화엄경’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여 새롭게 표명해 내는 저술을 하나 짓습니다. 그 작품이 만고의 명작인 ‘법계도(法界圖)’입니다. 이는 흔히 ‘해인도(海印圖)’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 화엄일승법계도
아마 보신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 봅니다만 바둑판 같은 정사각형 안에 선과 글자가 교차되고 있는 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시(盤詩)’라고도 말합니다. 그 ‘법계도’에 들어있는 글은 ‘법성게(法性偈)’입니다. 7언30구 210자의 글자가 정사각형의 도형을 공간분할하면서 돌고 또 돕니다. 굴곡은 모두 54각()입니다. 53선지식을 다 만나고 나서 성불하는 내용을 형상화했다고 말합니다.

정사각형의 중심에 있는 ‘법’자로부터 시작하여 54각을 건너서 ‘불’자로 끝납니다. 그 부분에 보면 ‘법’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불’이 있고 그 위에는 ‘중(衆)’이 나옵니다. 이 세 글자는 세로로 한 줄로 배치됩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라는 ‘화엄경’의 내용을 그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중’은 곧 ‘중생’이고 ‘법’은 ‘심(心)’과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법’자와 ‘불’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에 도달하여 ‘법’을 만나는 것입니다. ‘법’을 깨닫는 존재가 곧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한편 ‘법’과 ‘중’ 사이에는 선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중’에서 ‘법’으로 못 갑니다. 바로 옆에 있는 ‘생’으로 갑니다. 중생이 그런 존재입니다. ‘법’을 모르는 존재가 ‘중’입니다.

최초에 ‘법’으로부터 출발하여 돌고 도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윤회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성불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불’이 되어서 보면, 원래 옛날부터 이미 부처였음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상 스님은 이미 ‘알파고’를 머릿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중생은 그 의미를 다 깨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하여, 의상스님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하여 주석(記)을 씁니다. 원전인 ‘법계도’는 일종의 ‘시를 집어넣은 디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주석은 산문입니다.

이렇게 의상 스님의 ‘법계도’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드리는 것은, 사실은 그 주석 안에 나오는 한 마디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의상스님은 그렇게 ‘법계도’라는 것을 만들었을까요? 그냥 ‘화엄경’의 사상을 간략히 요약하더라도, 산문으로 할 수 있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과 시라는 예술적인 형식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 이유를 궁금해 할 수 있겠지요.

의상 스님은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주석 부분이 다 끝나는 마지막에 언급합니다. “그림과 함께 시에 의지하는 것은, 허구에 입각하여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所以依詩 卽虛現實故)”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허구는 픽션(fiction)입니다. 소설 같은 것을 우리는 픽션이라 합니다. 드라마도 영화도 다 픽션입니다. 설사 실화를 근거한 작품이라 해도 사실은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고 허구가 섞입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살던 동네에 찾아가서 그 주인공이 살던 집을 찾아가 본다 한들, 그런 집은 없습니다. 그런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어떤 소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허구는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허구는 결코 허구로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웃고 울고 합니다. 우리가 그런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읽거나 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그 속에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리얼리티(reality)’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리얼리티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느낌입니다.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의 삶의 모습은, 그러한 이야기는 지금 현실에 그대로는 존재하지 않지만(그런 의미에서 ‘공’입니다), 얼마든지 현실 속에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진실이라 하고, 리얼리티라고 합니다. 허구인데 진실함이 있다는 것은 곧 공(空)인데, 곧 그 공 속에 색(色)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러한 이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의상스님이 말씀하시는 ‘시’는 사실은, 우리가 쓰는 자유시나 시조와 같은 운문의 문학형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가 상징하는 것은 모든 문학과 예술 일반을 다 가리킵니다. 그런 예술작품은 바로 ‘허구’와 ‘진실’의 문턱입니다. ‘공’과 ‘색’의 문턱입니다.

이런 이치를 의상 스님은 ‘허구에 의지하여 진실을 나타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공에 의지하여 색을 나타낸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한자로 ‘즉(卽)’이라는 것은 ‘입각하여’ 내지 ‘의지하여’의 뜻입니다. 이 말은 무와 유, 공과 색을 매개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의상스님의 말씀에서 불교의 예술철학, 즉 미학(美學)의 클라이맥스(정점)를 봅니다. 이 이상 더 잘 불교의 미학을 정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미학의 원리를 말씀하셨다는 의미 외에도, 저로서는 그 말씀이야말로 바로 성립사적으로는 ‘불설이 아니라(非佛說)’고 폄하되기 쉬운 대승경전을 이해하는 최고의 열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승경전은 무엇인가? 초기경전과 어떻게 다른가?” 대승경전은 초기경전과 내용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형식이 ‘허구’라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역사적 실존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므로 형식적으로는 ‘허구’가 되지 못합니다. 형식은 허구가 아니면서 내용만 허구(무상, 고, 무아라는 내용은 곧 공이라는 뜻에서)입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역사적 실존인물이 아닌 등장인물과 무대장치 등으로 형식부터 허구이고, 내용도 허구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무아미타불’의 저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초기경전보다도 대승경전이 더욱더 불교의 진리를 핍진(逼眞)하게 전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내용이 공인데 형식마저 공이라고 하는 것이 그 내용의 공을 설하는 데 더없이 적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미타불과 극락을 이야기하는 정토삼부경 역시 대승경전입니다. 그러므로 정토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불교에서 보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미학이야말로 대승불교 이해의 기본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미학자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대승불교나 정토신앙을 잘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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