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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유가종의 태현과 화엄종의 법해

기자명 주수완

신라 스님들의 신통 대결은 불력의 힘 과시하는 방편

▲ 태현 스님이 주석했던 경주 남산 용장사의 원형대좌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

‘삼국유사’ 의해편의 ‘현유가·해화엄’조는 경덕왕대 고승들의 마법 대결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유가’의 ‘현’은 태현(太賢, ‘삼국유사’에서는 大賢으로 표기하고 있다)스님으로 신라에 유가종파를 개창한 승려였고, ‘해화엄’의 ‘해’는 법해 스님으로 화엄종에 속했다. 이야기는 태현 스님부터 시작한다. 태현 스님은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머물고 계셨는데 그곳에는 석조미륵장육상이 있었다. 그런데 태현 스님이 이 미륵불 주변을 도는 의식을 할 때마다 미륵불의 얼굴이 태현 스님을 돌아다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통일신라시대와 같은 고대불교에서는 이렇게 탑돌이 하듯이 불상 주변을 도는 요잡(繞?)의례가 일반적인 예불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법당에서 이렇게 불단을 돌면서 예불 드리지 않지만 원래는 탑돌이와 마찬가지로 불단을 도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료를 통해 분명히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불상 고개돌려 바라보는 설화
신라 때 흔한 이적으로 기록

태현 스님은 기우제 지내며
우물에서 물 솟구치는 이적

이러한 소식 접한 법해 스님
동해물로 연못을 넘치게 해

명랑법사가 풍랑을 일으켜
당군 물리친 것도 같은 내용

신통 자재했던 스님들 등장
신라불교의 신비로움 더해

여하간 이렇게 불상이 태현 스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는 이야기는 이와 비슷한 설화로서 설총이 아버지 원효 스님의 소조상을 향해 절을 하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는 설화를 연상케 한다. 즉 이렇게 고개를 돌려 예배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 예배자를 매우 아끼거나 친근해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미륵불상이 태현 스님을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 일본 쿄토 에이칸도의 고개를 돌린 목조아미타불입상. 11~12세기. 높이 77.7㎝.

태현 스님이 미륵불을 예경했다는 것은 유식학파에서 미륵을 종조로 생각하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유식불교를 근간으로 하는 유가종의 실질적 창시자는 아상가(무착)와 바수반두(세친) 형제스님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스님들이 유식의 근본 개념을 미륵으로부터 배웠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여하간 유가종파에서는 이처럼 미륵을 주존으로 봉안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유가종에 속한 승려는 ‘유가사(瑜伽師)’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특히 인도에 다녀온 삼장법사 현장이 이 유가종을 핵심으로 하는 법상종을 확립하였고,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태현 스님이 이 맥을 잇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남산 용장사에는 매우 특이한 석불상이 한 구 전한다. 사실 불상 자체는 일반적인 석불좌상일지 모르지만 그 불상이 올라가 있는 대좌가 마치 불탑의 상륜부처럼 둥그런 원판 세 개가 겹겹이 쌓여있는 형태라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고 유일한 형태인 것이다. 태현 스님이 요잡 의식을 했다는 미륵불상은 장육상이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는데, 장육은 1장6척이므로 대략 5m정도 크기인 셈이다. 비록 용장사 석불상은 이렇게 큰 불상은 아니지만, 만약 이 독특한 대좌까지 높이로 친다면 장육은 족히 될 듯하다. 따라서 많은 연구자들은 이 불상이 바로 태현 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바로 그 장육미륵불상으로 보고 있다.

▲ 경주 반월성 숭신전터에 있는 우물 내부. 아마도 태현 스님이 물을 치솟게 했다는 그 ‘금광정’이 아닐까?

물론 원래 장육상이라고 할 때는 불상의 높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대좌가 이렇게 특이하다보니 불상이 이처럼 매우 높은 곳에 앉아 계신 형상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대좌까지 합해 장육의 높이라 지칭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는 것이 그리 무리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다가 대좌가 마치 빙글빙글 돌기라도 할 것처럼 원형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으니 이 불상의 주변에서 요잡의식을 하거나 혹은 불상이 돌아다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보니 더욱 이 불상이야말로 ‘삼국유사’ 속 불상이라는 심증을 굳게 한다. 한편 일본의 에이칸도(永觀堂)에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유명한 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고려불화 중에도 뒤돌아보는 아미타불이 묘사된 것이 있는데, 아마 용장사 미륵상이 고개를 돌려 태현 스님을 바라보았다는 전설에서 그 시원적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하간 이 남산 골짜기 용장사에 머물던 태현 스님을 경덕왕이 753년에 궁궐로 불러낸 이유는 지독한 가뭄으로 나라가 어려웠기 때문에 ‘금광명경’ 강독회를 열어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에도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정화수를 떠놓고 의식을 치루었던 모양인데, 웬일인지 물을 뜨러 갔던 사람이 영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태현 스님의 의식을 돕던 감리가 왜 이리 늦는지 닦달하자 늦어진 이유인 즉 나라 전체가 가물어 궁궐의 우물도 말라버렸기 때문에 물을 뜰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태현 스님은 “왜 얼른 말하지 않았는가”하면서 향로에 향을 피우니 말라버렸던 궁궐 우물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는데, ‘삼국유사’는 그 솟구친 물의 높이가 7장이나 되어 건물의 찰당(刹幢) 높이만큼 솟았다고 전한다. ‘찰당’이란 보통 탑의 꼭대기에 솟아있는 찰주 부분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태현 스님이 기우제 의식을 치루던 곳에는 아마도 불탑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궁궐에 속한 내불당 쯤 되는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7장이면 21m 가량이니 결코 작지 않은 탑이다. 사람들은 태현 스님이 ‘금광명경’을 설하기 위해 왔다가 이러한 기적을 일으켰다고 해서 이 우물을 “금광정”이라 불렀다. 마침 신라 궁궐터인 반월성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현재는 석탈해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숭신전(崇信殿) 터로 알려진 곳이다. 이 우물은 매우 깊으며 불상의 수미좌처럼 생긴 네모난 돌로 장식이 되어 있는데 혹시 이곳이 전설의 금광정인지도 모른다.

한편 경덕왕은 이듬해인 754년에 화엄종의 고승 법해 스님을 황룡사에 모셔 ‘화엄경’의 강론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때 경덕왕이 그만 법해 스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발언을 하고야 만다. 즉 “작년에 보니 태현 스님은 궁궐 안 우물의 물을 7장이나 솟구치게 하는 도력을 지니셨던데, 스님의 도력은 어떠하신가요?” 물으니 점잖았던 법해 스님도 이 말에 자존심이 조금 상하셨던 모양이다. 법해 스님은 “무슨 그런 일로 왕께서는 호들갑이십니까. 저는 동해를 기울여 토함산을 넘어 경주 시내를 다 잠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고 응수했다. 이에 경덕왕은 이 스님은 허풍이 세시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그러자 아무래도 본보기를 좀 보여줘야 믿겠구나 싶었던 법해 스님이 말없이 법당의 향로를 조금 끌어당기자 잠시 뒤 궁궐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삼국유사’에는 “궁궐 동쪽의 연못이 넘쳐 내전이 떠내려갔다”고 했는데 궁궐 동쪽 연못이면 틀림없이 월지, 즉 안압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월성, 안압지 그리고 황룡사는 대각선으로 서로 연이어 있으니, 아마도 법해 스님이 황룡사에서 법회 중에 마법을 자랑하셨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안압지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 법해 스님이 동해를 기울게 했다는 754년 황룡사 화엄법회를 기념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이에 경덕왕이 소스라치게 놀라자 법해 스님은 “동해를 기울이기 전에 수맥을 잠시 불렸을 뿐입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는데 그제사 경덕왕은 법해 스님의 위력을 알아보고 정중히 절을 올렸으며, 법해 스님도 장난을 그만 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해가 정말로 기울어 동해안에 있는 감은사 금당 앞까지 물이 들어올 정도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날 법해 스님이 주관한 황룡사 ‘화엄경’ 강설회는 이렇듯 많은 화제를 뿌렸을 텐데 마침 이 때의 ‘화엄경’ 강론회를 기념하는 그림이 그려져 그 일부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바로 리움미술관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로서 연기법사라는 분이 발원하여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법해 스님과 함께 이 대형의 의식을 주관했던 분이 아닌가 한다.

언뜻 이 두 스님의 마법 대결은 법해 스님의 승리로 끝난 것 같다. 태현 스님은 우물물을 솟아나게 한 정도이지만, 법해 스님은 동해를 기울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내용을 대결로만 볼 수는 없다. 태현 스님은 단지 꼭 필요한 부분에 마법을 썼을 뿐이고, 법해 스님은 자신과 태현스님을 비교하니 어쩔 수 없이 조금 맛만 보여주었을 뿐이었기에 당시 유가종과 화엄종이 서로 다투거나 대결을 펼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니 누가 이겼다 졌다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언젠가 의상 스님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원효와 의상 스님이 원래는 법상종을 배우러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처럼 화엄종은 유식학적 방법론에 깊이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티베트의 밀교도 마찬가지이고,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한 선종도 마찬가지이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가르침을 전하며 자주 인용했다는 ‘능가경’ 역시 유식불교의 중요한 소의경전 중 하나이다. 이처럼 유식은 화엄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에 법해 스님이 굳이 태현 스님과 도력을 다투고자 하는 뜻은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이러한 설화를 통해 문무왕대의 밀교승 명랑법사 뿐 아니라 유가종와 화엄종 스님들의 마법 또한 대중에 널리 회자되었음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명랑법사가 서해에 풍랑을 일으켜 당의 수군을 물리친 것이나 태현 스님이 우물에서 물을 다시금 솟구치게 하여 가뭄을 그치게 한 것이나, 또 법해 스님이 동해를 기울여 불력의 힘을 과시한 것이나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는 물의 마법이었다. 찬한다.

삼장법사 옮겨온 장안의 유식 나무/열매는 신라 남산 용장골에 열렸네.
다시금 법상의 심오한 이치 통달하여/미륵의 고개 돌릴 유가사 그 누구인가.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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