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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중섭의 천진

거친 파도에도 순수 잃지 않은 천진한 화가

▲ 그림=근호

1953년 1월, 이중섭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포함된 소묘 10여 점이 출품된 그 전시회는 호평을 받았으나 가난한 살림에는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 절망한 그는 술을 마시며 자신을 학대하며 지내다 시인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여관방을 전전했다.

지속된 생활고에 자책도 심했지만
세상 꿰뚫는 통찰력 지녔던 인물
지혜로운 순수 지닌 노인·어린이
사후에 세상서 사랑받게 된 이유

그해 5월, 그는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장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었는데, 당시 미국 문화원 책임자였던 맥타카트가 그의 은종이 그림 3점을 사서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으로 나머지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고는 계속되었다. 실망은 분노로 이어졌고, 영양부족은  심각해졌다. 

마침내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이중섭은 그해 7월 한 달간 성가병원 정신과에 입원했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자 친지들이 그를 퇴원시켜 이종사촌 집에 머물게 했다. 그 후 그는 다시 수도 육군병원 정신과에 입원했으며,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겼다가 늦가을에야 퇴원했다. 몸은 황달까지 겹쳐 매우 피폐한 상태였다.

1956년,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화가는 자신의 무능을 자책했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가 선택한 것은 식음 전폐였다. 굶어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친지들은 그를 병원으로 옮겨 목구멍에 고무줄을 넣어 우유와 주스를 먹였다.

1956년 봄, 청량리 뇌병원은 그의 마음이 지쳐 있기는 했지만 그가 정신 이상자는 아니라고 판정했다. 이중섭은 악화된 간염을 치료하기 위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한 지 한 달 뒤인 9월 6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그는 홀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몸은 화장되어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일부는 일본에 머물고 있던 그의 부인에게 전해져 그녀의 집 뜰에 매장되었다.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군에서 아버지 이희주와 어머니 안악 이씨 사이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농이었다. 그가 다섯 살이던 때 그의 아버지가 별세했고, 그의 형이 아버지가 남긴 자산을 운영하여 크게 성공했다. 해방 전까지 형의 도움을 받으며 지낸 그의 경제는 풍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넘어 온 이후부터 사정은 급변하여 그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중섭은 매우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그의 지인들은 입을 모아 한결같이 증언했다. 그것은 그가 일본에 머물고 있던 그의 아내(이남덕)와 아들들(태성, 태현)에게 보낸 수십 점의 편지에도, 자신의 편지에서 자신의 아내를 호칭한 문장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나의 귀엽고 소중한 남덕 군, 가장 크고 유일한 기쁨인 남덕 군, 나의 거짓 없는 희망의 봉우리 남덕 군, 나의 귀여운 즐거움이여 소중한 나만의 오직 한 사람 나만의 남덕이여, 나의 살뜰한 사람 나 혼자만의 기차게 어여쁜 남덕 군, 나의 멋진 현처 나의 귀여운 남덕 나만의 소중한 사람이여, 내 마음을 끝없이 행복으로 채워주는 오직 하나의 천사 남덕 군, 세상에서 제일로 상냥하고 소중한 사람 나의 멋진 기쁨이며 한없이 귀여운 나의 남덕 군 등등.

이 마음 여린 화가가 어느 날 병석에 누워 있는 시인 구상을 찾아왔다. 그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도화지에 그린 그림 한 장을 친구에게 주었는데, 거기에는 복숭아 속에서 한 동자가 청개구리와 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주면서 그가 시인에게 말했다. “그 왜 무슨 병이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잖아! 그걸 상(常: 시인의 이름)이 먹구 얼른 나으라고. 요 말씀이지.” 

“이중섭의 인품은 천진(天眞) 바로 그것이었다.”고 구상 시인은 추억했다. 천진이라는 말은 좋게 쓰면 성자와 같다는 것을, 나쁘게 쓰면 바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상 시인에게 있어서 이중섭은 전자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이 화가에게는 사리와 사물을 파악하는 힘과 세상 물정과 인정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림 그릴 캔버스와 화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를 싸는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정을 그리워했던 사람, 그런 끝에 가난에 시달리다 병마에 쓰러진 사람, 쇄락해가는 삶을 살면서도 유머러스러했던 사람, 죽은 다음에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화가 대향(大鄕) 이중섭(李重燮).


예수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불교는 어린이를 예찬하지 않는다. 불교는 지혜를 가장 높은 덕목으로 보며, 지혜는  어린이에게는 기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입장에서 불교는 어린이 대신 노인을 숭상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노인은 어린이의 천진한 마음을 회복하게 마련이다. 

사람의 성장은 ①어린이(유치한)→ ②어른(시험기)→ ③노인(지혜로운 어린이)의 순서로 진행된다. 어린이는 순수하지만 유치하고, 어른은 순수가 시험받는 시기이며, 그 시험을 잘 통과하여 지혜로운 노인이 되면(하지만 많은 어른이 시험에서 탈락한다) 어린이의 순수가 회복된다. 하지만 ③노인의 순수는 유치한 순수가 아닌 가장 슬기로운 자의 순수라는 점에서 ①어린이의 순수와는 다르다. 그렇긴 해도 지혜가 순수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불교 또한 어린이(노인-어린이)를 예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 널리 사용되는 여여(如如)라는 말은 노인의 지혜와 함께하는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 그것이다. 여여는 ‘그러하고 그러한 마음’이자 ‘이러하고 이러한 마음’, 즉 인간이 본래부터 갖고 태어나는 마음이며, 그것은 천진한 마음이요, 부처님의 마음(불성)인 것이다.

문제는 그 마음이 세파에 시달리는 동안 소실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순수를 잃은 어른이 된다. 그런 가운데 아무리 거친 파도가 밀려온다고 해도 순수를 잃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을 천진한 마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유치한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놀라운 통찰력이 있었다고 그의 친구 구상은 회상했다. 그는 지혜로운 순수를 지닌 노인-어린이였던 것이다.

이중섭의 순진무구했던 삶이 그림 수십 점으로 남아 지금 우리 곁에 있다. 그 그림을 보며 우리는 잃어버린 천진을 생각한다. 나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서의 불성을 넌지시 짐작해본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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