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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장호의 ‘은행경’

기자명 김형중

서울 한 복판 세종로서 은행잎 보며
유신독재에 질타의 ‘할’ 보낸 저항시

부처님이 아난에게 설법하는
모습 취한 발상과 전개 참신
떨어지는 은행잎이 무상 설법
박정희독재에 권력 무상 일침

지혜로와라 은행잎이여/ 붓다는 가을날 어느 늦은 오후/ 세종로를 거닐며 내게/ 이렇게 일렀다.

시절을 마련할 줄 모르는 불자 있거든/ 하늬바람에 지천으로 떨어지는/저 은행잎을 보게 하라.

은행잎은 높은 가지 끝에서 스스로의 알몸을/ 땅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인간을 깨쳐주느니/ 아, 차바퀴 아래 저렇게 아우성치며/ 굴러가는 은행잎은/ 차라리 그 날 이 거리에 쏟아지던 데모대의 구보행렬-

흰 눈을 뒤집어쓰고 누렇게 매달린/ 미련스런 은행잎을 보았는가/ 자연 이법 따라 피고 질 줄 모르는/ 완명한 권자(權者)있거든 깨쳐주라고.

한 잎 은행잎의 정갈스런 맵시를 손에 들고 이윽히 내다보시며/ 스스로의 영위(營爲)만으로 능히 만 사람을 깨치게 되게 하라고.

그득하여라 은행잎이여/ 붓다는 또 다른 가을날 아침/ 운길산(雲吉山) 수종사(水鐘寺)를 지나며 내게/ 이렇게 일렀다.

열매도 익힌 지 오래/ 단지 그가 가지 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온 마을이 은광(恩光) 속에 잡힌 양/ 환하게 빛나는 저런 은행잎이게/ 스스로의 존재로 능히 만상(萬象)을 빛내라고.

이제는 해 다지고/ 거리에 비쳐드는 겨울의 강물/ 서녘 하늘에 아련히 비치는 잔가지의 조밀한 목소리로/ 수미산 상상봉에서 내다보노라니 딱하이/ 늬들 횡포를 참아 볼 수가 없구나.

행여 그런 말씀 하실까 고개를 들면/ 붓다는 아난존자도 아닌 내게/ 분명히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내 소리는 귀 있는 자만이 들으리라고.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부르는 은행나무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이다. 나무가 깨끗하고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병충해가 거의 없고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하여 가로수로 많이 심고 있다.

풍성한 가을의 결실을 찬양하는 듯한 노란 은행잎은 마지막 늦가을을 장식한다. 거리마다 가로수에 노란 금화가 수없이 매달려서 금방 쏟아질듯이 가을축제의 향연을 연출하고 있다.

장호(1929~1999) 시인은 서울 한복판인 세종로를 거닐며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고 1971년에 이 시를 썼다. 시의 형식은 마치 불교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하여 설법하는 모습을 취하였다.

그래서 시의 제목을 ‘은행경’이라고 하였다.

“지혜로와라 은행잎이여, 붓다는 가을날 어느 늦은 오후 세종로를 거닐며 내게 이렇게 일렀다.” 참 재미있는 발상이고 시의 전개가 참신하다. “시절(時節)을 마련할 줄 모르는 불자 있거든 하늬바람에 지천으로 떨어지는 저 은행잎을 보게 하라”고 읊은 것은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이 무상(無常) 설법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은행경’은 시대적 상황이 1971년, 박정희 유신독재를 향한 질타의 할! 을 보낸 저항시이다. 다만 김지하의 ‘오적’ 시처럼 독재 권력에 부역하는 부패한 무리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은행잎의 무상함에 비유하여 권력 무상을 일깨운 것이다.

시의 주제는 5연에 나타나 있다. “흰 눈을 뒤집어쓰고 누렇게 매달린 미련한 은행잎을 보았는가. 자연의 이법에 따라 피고 질 줄 모르는 완명한 권자(權者)있거든 깨쳐주라고.”

“수미산 상상봉에서 내다보노라니 딱하이. 늬들 횡포를 참아 볼 수가 없구나 … 내 소리는 귀 있는 자만이 들으리라고”라고 결구하였다.

장호 시인은 동국대학교 교수, 수필가, 극작가, 연극평론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산악인로써 돈독한 불심을 갖고 ‘연탄경’ 등의 불교시와 ‘불교문학과 희랍비극’ 등의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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