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7.11.17 금 20:25
> 연재 | 이제열의 파격의 유마경
40. 행위는 행위가 아니다모든 것은 조건 의지해 나타난 거짓현상
이제열  |  yoomalee@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11.14  18:03:0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이 때 유마힐이 말하였다. 잘 오셨습니다. 문수사리여, 온다는 상이 없이 오셨고 본다는 상이 없이 보십니다. 문수사리보살이 그렇습니다. 거사님, 왔다고 하나 온바가 없으며 갔다고 하나 간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왔다고 하나 온 주체가 없으며 갔다고 하나 간 주체가 없습니다. 본다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실상에 있어서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 존재는 홀로 존재 못해
다른 조건들 서로 만나 생겨
마음도 물질과 다르지 않아
보고 들어도 실제주체 없어


이런 문답이나 설법은 대승경전 곳곳에 나타난다. 초심자나 소승의 가르침에 머문 자들은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 내용들이다. 예컨대 일체의 법이 움직이지 않는다느니, 모든 행이 끊어졌다느니, 눈도 귀도 코도 물질도 소리도 냄새도 없다는 등의 말씀들은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내용들이다.

이는 세간의 범부중생의 안목에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출세간의 부처님들이 보는 세상이다. 우선 유마거사가 문수사리보살에게 온다고 하나 온다는 상이 없이 왔다는 내용을 살펴보자. 이는 일체의 상이 모두 끊어진 깨달음의 청정한 지혜에 의해서 오고 감을 말하는 것으로 청정한 지혜에 의해 비추어 보면 중생들과 일체 만법의 움직임은 움직임이 아니다. 중생들이 보기에는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면서 오고 가고, 눕고 앉고, 태어나고 죽고,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청정한 지혜의 비춤에 의하면 일체만법은 움직임이 없고 변화함이 없다.

온갖 존재의 움직임과 변화는 중생의 상(相), 즉 분별과 생각에 의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일체만법은 마음에서 일어난 상을 따라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대승에서 바라본 세계관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불교교리의 근간이 되는 연기의 교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단, 여기서 가르치는 연기의 교설은 소승법(여기서 소승법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에서 가르치는 오온을 중심으로 한 십이연기나 업감연기의 교설이 아닌 대승에서 가르치는 삼라만상을 포함한 제법연기교설이다. 제법연기설에 의하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다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기고 나타난다. 그 무엇도 스스로를 스스로가 만들거나 나게 할 수 없다. 태양이 태양을 만들지 못하고, 땅이 땅을 만들지 못하며 자신을 자신이 만들지 못한다. 돌 나무 풀 먼지 하나까지도 모두 다른 조건인 연(緣)을 따라 일어나거나(起) 생길(生)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물질뿐만 아니라 마음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마음 또한 연기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본래부터 존재했다거나 마음 스스로가 마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모든 물질은 다른 물질에 의존하고 모든 마음은 인식의 의지처가 되는 육근과 육경에 의존한다. 중생들의 몸은 지·수·화·풍 사대가 연기된 것이며 마음은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에 의존한다.

바로 이와 같은 도리에서 바라본다면 중생들의 몸과 마음은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으며 주재자가 없고 자아가 없다. 세상을 살아가지만 실로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는 없는 것이다. 중생들은 하루 종일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러면서 중생들은 ‘나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존재’라고 여기고 이를 고정적 진실로 규정해 놓고 살아간다. 하지만 연기의 이치에서 보면 진실로 보는 자, 듣는 자, 생각하는 자, 움직이는 자는 없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지해 나타나는 거짓현상인 것이다.

이렇게 보는 자, 듣는 자, 생각하는 자, 행동하는 자가 모두 실체가 없는 거짓된 현상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들에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 역시 실체가 없는 거짓현상이다. 보았다고 하나 본바가 없고, 들었다고 하나 들은 바가 없고, 생각했다고 하나 생각한 바가 없고, 행동했다고 하나 행동한 바가 없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한 주체가 실로 실체가 없으므로 보는 행위, 듣는 행위, 생각하는 행위는 실유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곧 문수와 유마거사는 이와 같은 연기의 도리를 문답을 통해 확인 시켜주는 것이다. 오는 놈, 보는 놈, 오는 행위, 보는 행위가 모두 인연으로 나타난 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대승의 문은 열린다고 할 수 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라인
라인
포토뉴스
라인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실시간뉴스
라인
여백
법보신문은찾아오시는길구독·법보시광고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03157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편집국 : 02-725-7014  |  광고문의 : 02-725-7013  |  구독신청 : 02-725-7010
사업자 등록번호 : 101-86-19053  |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07229  |  등록일자 : 2005년 11월 29일  |  제호 : 법보신문
발행인 : 김형규  |  편집인 : 이재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형규
Copyright © 2013 법보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