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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한 ‘식은 밥’에 담긴 뜨거운 ‘금강 지혜’ 예 있더라

  • 교계
  • 입력 2017.11.21 10:24
  • 수정 2017.11.2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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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 스님과 찾아간 인도 성지
슈라바스티 기원정사 수계법회 현장

▲ 석종사 인도성지순례단은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한 기원정사에서 부처님의 평범한 하루가 일러주는 지혜가 무엇인지 되새겼다. 혜국 스님이 설한 수계의 의미 역시 불제자를 발원하는 순례단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인도 슈라바스티는 모난 데가 없었다. 옛 왕국의 영화는 날아갔거나 묻혀버린 듯했다. 기원정사 가는 길에는 안개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동쪽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기원정사에 들어섰다. 하얀 보름달이 서쪽하늘에 걸려있었다. 밤새 세상을 비추느라 붉은 기운을 다 쏟아냈을까. 기운데 없는 보름달이었지만 창백했다. 부처님도 저 달을 보았을 것이다. 부처의 달을 우리가 보고 있었다.

178명 석종사 인도성지순례단
‘금강경’ 설법성지서 수계법회
28살 처음 인도 찾은 혜국 스님
8번째 순례지만 “여전히 감동”

11월4일 새벽이었다. 일행은 천천히 걸으며 “석가모니불”을 정근했다. 남과 여, 높고 낮은 소리가 안개를 밀어냈다. 유난히 키가 작은 스님이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끌었다. 충주 석종사 선원장 혜국 스님이다. 그 뒤를 제자들과 신도들이 따랐다. ‘혜국 스님과 함께하는 천축국성지순례단’은 이렇게 부처님 ‘말씀의 땅’ 기원정사에서 두 손을 모았다. 

▲ 혜국 스님 등 석종사 인도성지순례단이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기원정사에 들어서고 있다.

수많은 경전은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로 시작한다. 사위성(舍衛城)은 산스크리트어로 슈라바스티이며 당시 강국이었던 코살라국의 수도였다. 기원정사는 사위성 남쪽에 있었고, 부처님은 이곳에서 19번의 안거를 지냈다. 

기원정사는 사위성의 부호였던 수닷타 장자가 세웠다. 평소 보시를 잘했기에 수닷타는 ‘고독한 자에게 나눠준다’는 뜻의 급고독(給孤獨)으로 불렸다. 그런 수닷타가 부처님을 친견하고는 크게 깨달았다. 부처님 거처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 둘러보니 코살라국 제타(한역 祇陀)태자 소유의 제타바나 동산이 마음에 들었다. 제타를 찾아가 숲을 팔라고 했다. 태자는 비웃었다. 수닷타에게 금으로 온 숲을 덮으면 팔겠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닷타는 숲 속에 금을 깔기 시작했다. 제타는 수닷타의 신심에 감동했고 결국 숲 전체를 기증했다. 마침내 제타의 숲[祇樹]에 수닷타(給孤獨)는 원을 이뤘다. 경전마다 나오는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은 이렇게 탄생했다. 부처님은 현전하는 경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설했다.

▲ 순례단은 부처님이 법을 설했던 자리를 바라보며 앉았다.

순례자들은 부처님이 법을 설했던 자리 간다쿠티를 바라보며 앉았다. 혜국 스님은 말이 없었다.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합장했다. 스님은 28살에 홀로 인도를 찾았다. 그렇게 부처님의 땅을 밟고 싶었다. 길은 멀고 험했다. 한국을 떠난 지 27일 만에야 기원정사에서 엎드렸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부처님이 그렇게 고마웠다. 

“당신께서 진리의 빛을 발견해서 알려주지 않았으면 저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경전에 나온 것들이 모두 사실이었음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가슴이 마냥 벅차올랐다. 6일 동안 그렇게 있었다. 당시에는 혼자 힘들게 왔지만 이제 듬직한 제자와 신심이 두터운 신도 178명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어느덧 큰스님이라 불리었다. 무리를 천천히 돌아보며 혜국 스님이 말했다.

▲ 혜국 스님은 ‘금강경’의 시작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지금도 가슴이 뜁니다. 여덟 번이나 왔는데도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여전히 부처님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귀중한 ‘금강경’을 설해 주셨습니다. 일체 상(相)에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흔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금강경’의 땅에 와서 부디 거룩한 가르침을 새기서 가져가길 바랍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각별했다. 저편 언덕[彼岸]에 이르게 하는 금강석 같은 지혜가 담겨 있었다. 

‘이때 세존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1250명과 함께 계셨다. 세존께서는 식사시간이 되어, 옷 입고 바리때를 들고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 걸식하셨다. 성안에서 한 집 한 집 빌어 드시고는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오셨다. 식사를 끝내고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닦으신 후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금강경’ 제1품)

▲ 부처님이 법을 설한 간다쿠티를 참배하고 있다.

‘금강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부처님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처님은 연꽃만 즈려 밟고 가리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와 똑같다. 여기에 큰 가르침이 들어있다. 손수 음식을 구걸함은 교만을 버림이요, 한 집 한 집 차례로 구걸함은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음이요, 본디 자리로 돌아옴은 제 자리를 찾아감이요, 발을 닦음은 몸으로 지은 업을 씻어냄이요, 자리를 펴고 앉음은 다시 깨달음의 세계인 공(空)속으로 들어감이다. 부처님은 이렇듯 말없이 가르치셨다.

▲ 간다쿠티를 참배한 순례단은 잠시 입정에 들었다.

혜국 스님과 순례자들이 ‘금강경’을 독송했다. 동방의 석종사에서 온 순례자들은 제자 수보리가 되어 부처님께 물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리 내어 받았다. 독송이 멈춘 후 침묵이 흘렀다. 눈을 감고 있으니 2500년 전의 그날이 펼쳐졌다. 이윽고 혜국 스님이 말했다.

“그때도 오늘처럼 안개가 자욱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랑 1250명의 비구들이 우리들처럼 이 나무 아래, 저 나무 아래 앉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해가 솟아나면 기사를 수하고 맨발로 탁발을 나갔습니다. 발우가 차면 돌아왔는데 제자 가섭의 발우에는 항상 형편없는 식은 밥이 담겨있었고, 아난의 발우엔 좋은 밥이 담겨있었습니다. 부처님이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아난이 대답하기를 ‘가난한 사람은 끼니를 잇기도 어려우니 부잣집에서 탁발했다’고 했습니다. 가섭은 ‘부자는 복을 지어 잘 살지만 가난한 사람은 지은 복이 없음이니 가난한 사람에게 다음 생을 위해 복을 짓도록 하려 탁발했다’고 답했습니다. 부처님이 듣고 말씀하시기를 ‘부자와 가난한 자는 집과 음식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여유롭고 행복하냐에 달렸다’고 하시면서 ‘부자와 가난한 집을 가리지 말고 일곱 집만 탁발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 부처님 재세시부터 지금에 이르고 있는 우물에 둘러 앉아 입정에 드는 순례단.

“부처님은 탁발에서 돌아와 가사를 벗고 발을 씻고 공양을 마친 후에 당신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불교가, 간화선이 들어있습니다. 당신이라는 생각은 요만큼도 없고, 연기가 움직이고 공성(空性)이 탁발하러가고 공성이 돌아와서 공성으로 앉아있는 것입니다. 오직 중생들을 위한 마음, 중생들에게 도를 주겠다는 마음, 중생들에게 법을 주겠다는 마음을 탁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늙은 제자 수보리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절하며 부처님께 여쭙니다. ‘세존이시여 정말 거룩하십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고 잘 붙들어주신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마음이 청정하고 지극히 선한 경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고 부처님은 기뻤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말없는 가르침을 알고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시작입니다.”

▲ 순례단은 기원정사에서 오계를 수지하며 부처님 제자로서의 삶을 발원했다.

키 작은 스님의 사자후를 키 큰 보리수가 듣고 있었다. 기원정사 동쪽에서 해가 불끈 솟아올랐다. 마치 수계법회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혜국 스님이 삼보를 찬탄했다.

“이 마음 불성이 신령스럽고 밝아 고요히 비추니 참되고 항상 하여라. 삼보 전에 귀의하여 오계를 받아 삶의 기틀 삼으리. 삼보는 자비하신 배 한 조각 마음의 향을 사르어 진리 가운데 왕이신 삼보에 귀의하고 정례드리옵니다.”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삼보를 청했으며, 수계법사로 혜국 스님을 청했다. 계사의 청을 받아들인 혜국 스님이 오계(五戒)를 설했다. 스님이 오른 손을 치켜들었다. 햇살이 세 손가락이 없는 손바닥에서 부서졌다.
‘아, 손가락 없는 저 손. 왜 우리들 가슴이 먹먹해질까. 스님이 부처님께 저 손을 보이고 싶었구나.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상을 없애라고 일렀건만…. 아마 큰스님은 아직도 부처님이 사무치게 그리운가 보다.’    

혜국 스님은 22살에 오른손가락 3개를 사르는 소지공양을 했다. 13살에 산문을 넘었으니 꼭 10년만이었다. 해인사 장경각에서 하루 5000배씩 10만배를 올리고 손가락에 기름 묻은 솜을 묶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평생 참선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소지공양에는 30분 정도 걸렸다. 혜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불로 모든 것을 사르고 싶었다. 불처럼 일어나 성불하고 싶었다. 그러나 구도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다시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7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수행을 이어갔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제자들과 신도들은 손가락 없는 손을 마음으로 붙들었다. 혜국 스님이 오계를 설했다.

“첫째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 내가 오른손을 들었습니다. 또 이렇게 왼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왼손, 오른손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촛불과 태극기, 너와 나로 나뉩니다. 하지만 왼손, 오른손을 움직이는 것은 기운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기운은 내 것이 아닙니다. 태양과 나무와 풀과 물 같은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 내 것이 아니라 빌려온 것입니다. 빌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살생입니다. 나의 실상을 모르는 것이 살생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설파하면서 경고했습니다. 정신문명이 과학보다 반 발짝이라도 앞서가면 인류에게 유익하지만 과학만을 따라가다가는 인류가 전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곧 살생입니다.”

혜국 스님은 도둑질하지 말라, 사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먹고 취하여 정신을 잃지 말라며 차례로 설했다. 특히 부처님 계실 때는 술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마약과 도박, 그리고 게임 중독 등이 술 못지않은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혜국 스님이 참회문을 읽었다. 

“저희 수계자들은 한량없는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어, 아만과 게으름으로 많은 죄업을 지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몸과 말과 생각을 가다듬어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나이다.”

수계자들이 흐느꼈다.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았다. 참회인지 환희심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부처님이 계셨음이었다.

인도=김택근 법보신문 고문

[1416호 / 2017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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