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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병들지 않는 사람이 병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하

부처가 되겠다는 욕망이야말로 최대의 탐심

▲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고윤숙 화가

그런데 선가에서는 ‘병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물음이 종종 등장한다. 대개는 병든 선사들에게 던져지는 물음이다. 가령 덕산이 병이 들었을 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고요함 얻으려고 소란 탓하는 게 ‘소란’
아프거나 병든 몸 그대로가 부처이니
부처 찾는 이라면 병듦 자체 긍정해야

“병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
“있다.”
“병들지 않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아야! 아야!”

“아야! 아야!”는 아픔을 표현하는 감탄사다. 그러니 덕산의 대답은 병들지 않는 사람 또한 병든다는 말이다. 병들지 않는 사람도 병든다는 대답이니 선승들이 흔히 사용하는 역설이다. 그런데 이 역설로 덕산은 무얼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병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 아니면 병들지 않음이란 병의 일종이라는 것? 어느 것이든 병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 아닌가? 이것뿐이라면 너무 평범한 말 아닌가? 그렇다면 병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대체 왜 했던 것일까?

동산(洞山)에게서도 비슷한 공안이 전해져 내려온다. 동산이 병이 들었을 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화상께서 병이 들었는데, 병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
“있다.”

동산 역시 덕산과 동일하게 답했다. 그런데 학인이 이번엔 다르게 묻는다.

“병들지 않는 사람이 화상을 간호해줍니까?”
“오히려 나에게 그를 간호해줄 힘이 있다.”
“[병든] 화상께서 어떻게 그를 간호할 수 있습니까?”
“내가 간호할 때는 병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여기선 병들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병든 동산의 본래면목 같은 것, 다른 말로 ‘본래인(本來人)’ 같은 것이다. 청정(淸淨)하여 오염되지도 않고 먼지가 끼지도 않는 공한 본성이다. 그렇다면 병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현행의 나, 그때그때의 연기적 조건 속에서 사는 사람들, 혹은 지금 현재를 사는 ‘금일인(今日人)’이다. 덕산이 한 말도 이렇게 보면 쉽게 이해된다. 모든 사람은 청정한 ‘자성’, 공한 본성을 갖고 있기에 병들지 않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연기적 세간을 살아가며 병들고 물드는 현행의 사람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모두들 세간의 삶을 살면서 병들고 오염되지만 그 본성은 본래 공하여 청정하니 병들어도 병들지 않는 것이다.

동산에게 물은 학인은 세간의 통념에 따라 병들지 않은 사람이 병든 사람을 간호해주느냐고 묻는다. 본래인, 본래면목이 지금 조건에서 병들고 오염되는 현실의 ‘나’로 현행화되지만, 본래 청정하여 병들지 않는 그 잠재적 능력이 병들며 사는 현행의 ‘나’를 돌보느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동산은 역으로 병든 자신이 병들지 않는 사람을, 본래면목을 간호하고 돌볼 힘이 있다고 말한다. 간호할 것도 없고 돌볼 것도 없는 청정한 본성인데 무얼 돌본다는 말인가? 아니, 학인이 다시 묻듯이 병들고 물든 사람이 어찌 병들지 않은 사람을 돌본다는 말인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를, 청정한 자성을 찾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하긴 모든 중생이 본래부처라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부처 아닌 중생으로 병드는 사람으로 산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나 차라리 그와는 반대되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본래면목이 공한 것은 어떤 연기적 조건이든 그에 따라 다른 본성,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고, 본래 청정하여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음은 물들지 않은 상태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에도 물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하고 청정한 본성이 공하고 청정한 것은 그때마다 다른 물을 들이는 현행의 삶, 현행의 조건 때문이라 해야 한다. 요컨대 본래부처란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현행의 병드는 자의 삶 모두와 그 자리에서 함께 하고 있으며, 바로 그렇게 모든 병에 자신을 내어줄 수 있기에 병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간호할 때는 병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뜻일 게다.

물들지 않는 부처가 따로 있다고 하는 생각이야말로 선사들의 ‘간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부처에 대해 말하곤 곧바로 거기에 미혹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 그 말을 뒤집는다. 가령 협산선회(夾山善會)가 어느 학인의 물음에 답한 말이 그렇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햇빛이 눈앞에 가득하니, 만 리에 조각구름도 걸리지 않았느니라.”
“학인(學人)이 어떻게 알아야 됩니까?”
“맑은 못 물 속에 노는 고기가 스스로 미혹하느니라.”

도란 만 리에 구름 한 조각 없는 본래 청정한 햇빛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 머무는 순간, 맑은 물속에서 노는 고기가 스스로를 미혹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현행의 조건에 물들고 세간의 삶 속에서 병드는 세인의 병과는 다른 병이다. 깨달음이나 부처에 사로잡히고 물드는 병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자성이란 무엇이라는 정확한 답조차 그 딱 들어맞는 답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면, 그것은 깨달음이란 이름의 속박이 된다.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고요한 곳을 찾고 고요함을 얻겠다는 생각에서 소란스런 것을 욕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부처에 매인 것이고 고요함에 사로잡힌 것이다. 고요함을 위해 소란을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소란이고, 자신이 체험한 삼매를 자랑삼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소유욕이며, 부처가 되겠다는 욕망이야말로 최대의 탐심이고 깨달음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최대의 집착이다. 그래서 선사에서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도 내려놓고 부처를 구하겠다는 마음도 내려놓으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마조의 유명한 공안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 마조 또한 말년에 몸이 아팠다고 한다. 어느날 원주가 물었다.

“스님, 오늘은 몸이 어떠하십니까?”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이 공안을 두고 대개는 일면불, 월면불이란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에 나오는 부처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일면불은 1800년을 살고 월면불은 하루밖에 못사니, 이제 죽나 언제 죽나 아무 상관없다’는 말이라고 한다. 생사심을 떠난 경지를 표현한 말이란 뜻이다. 그러나 중요한 경전에도 개의치 않는 선에서,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저 경전을 전제로 제자에게 저리 말했다면 그건 선승답지 않은 일이다. 즉 부처의 이름이라고 가정하고 수명을 언급하며 생사를 떠나있음을 설파하는 것으로 보아선 곤란하다. 그보다는 ‘몸이 어떠하시느냐’는 원주의 물음에 대해 ‘해가 부처를 만나고(面) 달이 부처를 만난다’는 말로 답한 것이다. 매월매일 부처로서 살고 있다는 말일 게다. 몸이 아파도 부처, 아니 몸이 아픈 게 부처니, 부처로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말일 게다. 병든 몸 그대로 바로 부처인 것이고, 부처란 그렇게 병들고 죽는 몸과 따로 있지 않다고 하면서, 부처를 찾는 제자에게 그렇게 병든 몸마저 있는 그대로 긍정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 게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16호 / 2017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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