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냉산 도리사-서대-금수굴
66. 냉산 도리사-서대-금수굴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7.11.2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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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바라보며 한국불교 최대 미스터리 ‘아도’를 회상하다

▲ 구미의 냉산은 금오산과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 낙동강이 흐른다. 저 계단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금수굴이다.

아도! 한국불교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삼국시대에 출현하는 아도는 ‘我道’, ‘阿道’, ‘阿度’ 등 동음 한자를 쓰는 3인이다. 세 명의 아도 전기 또한 유사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묵호자(墨胡子) 또한 아도의 설화 구조와 맥을 같이 하는데. 그는 곳곳에서 아도와 동일인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도, 묵호자 모두 실존했던 특정인물일 수도 있지만 신라에 법을 전하려 했던 전법승을 통칭한 이름일수도 있다.

단언컨대 그 어떤 문헌이나 비석문을 취하든 신라불교 전래 최초인을 속 시원히 규명할 수는 없다. 한 쪽을 취하는 순간 동일 자료 내에서는 물론 서로 다른 자료간의 상호 충돌과 역사적 모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아도 중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신라의 불교전래 시기는 삼국 중 가장 빠를 수도 있다. 하여 오늘은 아도화상의 비문을 연구한 김영태 선생의 ‘아도화상(我道和尙)의 신구비문(新舊碑文)에 대하여’ 논문을 품고 아도가 삼매에 들었던 도림사 좌선대를 시작으로 아도의 입적 성지로 알려진 냉산 금수굴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 아도본비(我道本碑)라고도 한다. 신 비문)’에 등장하는 아도(我道)는 중국 조위(曹魏)사람 아굴마(我?摩)가 정시(正始) 년간(240∼248) 때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寧)과 연분을 맺어 낳은 아들이다. 어머니는 그를 다섯 살 때 출가시켰고, 중국에서 불교를 공부한 후 19살 때 귀국했다. 계림으로 들어 가 법을 펴 신라불교 최초 전래자가 되라는 어머니 뜻에 따라 신라 미추왕 2년에 국경을 넘었다.

아도 탄생년도를 245년 전후라 가정하고 5살에 출가했다면,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오기(372) 약 120여 년 전에 출가 한 셈이다. 가능할까? 아도의 신라 입국 시기가 미추왕(262∼284) 2년이면 263년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불교전래 시기는 정설로 굳어 진 고구려 불교전래(372) 보다 100년 빠르고, 신라불교 공인(527) 보다 260여년 앞선다. 자국 포교는 아예 포기한 채 신라를 택한 이유가 “3천여 달이 지난 뒤 계림에 성왕이 출현하여 크게 불교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어머니 예언에 따른 것이라는 게 석연치 않다. 김영태 선생의 견해(논문)를 들어보자.

‘아버지의 성 아(我)와 어머니의 이름 가운데 도(道)자를 따서 아도(我道)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도의 행적은 종래의 전법승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함으로써 신라 전법성자상(傳法聖者像)을 확립한 창작설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도화상이 가부좌한 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는 좌선대. 그 앞에 ‘아도화상사적비’가 서 있다.

왜 하필 미추왕 2년인 263년일까?

‘고구려 불교의 초전(初傳)보다 100여년 앞선 연대를 잡다가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신라 김씨 왕조의 첫 임금인 미추왕 때로 연대를 올려서 2년으로 정한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림사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 구 비문)’에 새겨 있는 아도(阿度)는 356년에 고구려 온 중국 동진(東晋)의 사신 굴마(屈摩. 해동고승전의 수이전에서처럼 성(姓)이 빠져 있다)와 도령(道寧) 사이에서 4월 초파일에 태어난 인물이다.

372년 중국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는데 이 때 위나라 왕이 아도(阿度)라는 법호를 내렸다. 그 후 현창(玄暢. 남북조 당시 활동한 승려) 화상을 찾아가니 또한 ‘아도(我道)’라 이름 했다. 법호는 아도(阿度), 법명은 아도(我道)라는 얘기다.

19세(375)세 때 귀국한 아도는 ‘불도가 없는 고구려를 떠나 경주로 가라’는 어머니 뜻에 따라 눌지왕(417∼458)치세 때 신라로 입국 했다. 아도는 법명을 내려놓고 묵호자라는 이름으로 모례 집에 살면서 소치는 일을 하며 품삯을 받았다. 선좌에 든 채 상서로운 광명을 내뿜자 모례가 도리암(桃李庵)을 지어 보시했고, 마을도 도개촌(桃開村)이라 했다.

도리사를 떠났던 묵호자는 소지왕(479~500) 때 아도(阿度)라 일컫고 다시 도리암으로 돌아 왔다. 공주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아도는 신라 왕에게 천경림을 준다면 병든 공주의 병을 치유하겠다고 제안한다.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했는데 오직 이차돈만이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목을 쳤고 그 순간 우윳빛 피가 솟구쳤다. 왕과 신하들이 신이하게 여겨 순교 자리에 절을 짓고 백률사(栢栗寺)라 했다. 법흥왕이 아도에게 천경림을 하사하자 아도는 공주를 치료 했다. 법흘왕은 이후 신라 땅에 대작불사를 추진하며 불법을 펴는 데 앞장섰다.

▲ 극락전과 3층석탑이 보이는 도리사 전경.

왕, 절, 마을 이름이 정확하고 이차돈이라는 실존 인물까지 등장하는 것은 물론 그에 맞는 비(碑)와 좌선대가 도림사에 존재하니 완벽한 사료가 아닐까 하지만 허점이 곳곳에 보인다. 일례로 아도가 귀국했을 때(375)는 이미 순도가 372년에 불교를 전한 이후다. 따라서 ‘고구려에 불도가 없다’는 어머니의 말은 맞지 않는다. 비문 문맥상 아도는 귀국 직후인 19살 때나 늦어도 20대에는 신라로 넘어가야 하는데 눌지왕 치세 때(417∼457) 갔다고 새겨져 있으니 그의 나이 60이 넘어서다. 무엇보다 가부좌한 채로 공중으로 날아오를 정도의 고승이 재물을 주면 병을 고쳐준다는 게 마땅치 않다. 아도 관련 문헌과 비문 중 아도(阿度)라는 이름은 ‘아도화상사적비’에만 등장한다.

1639년 이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문은 기존의 자료를 편집 해 멋지게 이야기를 엮었으나 팩트 체크를 소홀히 하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사료 가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도림사 창건설화 관점에서 평가할 때 비문의 가치는 높다.

묵호자, 아도, 이차돈, 그리고 법흥왕을 관통하는 대표 자료는 없을까? 신라시대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설화집 ‘계림잡전(鷄林雜傳)’이 있다. 현재는 전하지 않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조 편에 그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눌지왕(417∼457) 때 신라에 온 묵호자는 모례집에 머물렀다. 중국 양(梁)나라 사신이 가져 온 향의 쓰임새를 궁궐 안 사람들이 모르자 묵호자가 “향을 태우면 향기가 아름답게 퍼져 불법승 삼보(三寶)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한다”며 가르쳐 주었다. 또한 공주의 병을 치료 하자 왕은 묵호자에게 답례로 예물을 넉넉하게 보시했고, 묵호자는 그 정재를 모례에게 주고는 “나는 이제 갈곳이 있다”며 떠났다.

비처왕(475∼500) 때 아도(我道) 화상이 시자 세 사람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나타났다. 묵호자와 비슷했고 수년 동안 머물다 아무 병도 없이 입적했다. 시자 세 사람은 모례 집에 머물며 졍전과 율을 강독했다. 그 무렵 법흥왕(514∼539)이 불교를 일으키려 했으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았다. 이차돈이 순교하며 이적을 보이자 신하들은 더 이상 불사(佛事)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차돈의 순교 직후 불교가 공인된 사실을 전하고 있으니 현재 정설로 택하고 있는 ‘법흥왕 불교 공인설’과 딱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면 신라불교 최초 전래인은 누굴까? 묵호자와 아도는 비슷하나 다른 인물로 그려져 있다. 향과 삼보의 뜻을 전한 묵호자일까? 승려 신분으로 시자와 함께 신라 땅을 밟고 법을 전한 아도(我道)일까?

혹, 묵호자와 아도는 같은 인물이었던 건 아닐까? 묵호자가 눌지왕 재위 초기(417)에 나타났다고 가정하면 아도가 비처왕 마지막 재위 마지막 때(500) 입적했다 해도 그 사이에는 83년의 세월만이 존재한다. 아도가 노년의 묵호자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성하다.

▲ 도개촌 사람들 사이에서는 매년 금수굴에서 상서로운 빛이 일어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신라불교 최초 전래자로 아도만을 택하고 싶다면 고려의 각훈이 정리한 ‘해동고승전 고기(古記)’를 펼쳐 보시라. 묵호자와 이차돈은 등장하지 않으며 공주를 치료했다거나 왕의 하사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吳)나라 사신이 가져 온 향이 무엇인지를 궁궐 사람들이 모르자 527년 신라에 온 아도(我道)가 “이것은 향이란 것으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라 가르쳐 주었다. 오 나라 사신이 직접 아도를 찾아가서는 “이런 변방 나라에 어떻게 고승께서 멀다 않으시고 찾아 오셨습니까!”하였다. 법흥왕은 이 일로 불경과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칙령을 내려 불법을 전하도록 허락했다.

아도 출현의 애매모호함이나 이적현상은 없다. 날실과 씨실이 정확히 직각을 이루며 옷을 짜 가듯 군더더기 없이 사실로만 구성돼 있는 듯해 매력적이다. 그런데 여기에 무게를 둔 순간부터 신라 불교는 이차돈 순교가 아닌 아도의 향(香) 전수로 의해 공인됐다는 사실(?)과 불교수용에 따른 신하들의 거센 반대도 없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기존 학계의 정설에 맞서야 하는 부담감이 뒤따른다.

신라불교 최초 전래자가 누구든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고구려 전법승들은 목숨을 내놓고 이웃 나라이자 적대국이었던 신라에 불법을 전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 세월은 100년일 수도 있고 200년일 수도 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도리사 적멸보궁을 마주하며 오른쪽으로 가면 3층석탑과 좌선대를 만난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서대에 닿는다. 서대로 가는 초입과 적멸보궁 사이의 소나무 숲 위로 난 길이 냉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후 아도순례길 이정표를 확인해 가며 산길을 걷는다면 무리 없이 금수굴에 닿는다. 갔던 길을 그대로 뒤돌아 오는 원점회귀를 택할 경우 왕복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금수굴에서 산길이 아닌 임도로 내려가 ‘신라불교 역사문화체험 숲길’, ‘냉산 칡넝쿨길’과 연계해 도리사로 올수도 있다. 이 길은 10km에 이르고 약 5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것만은 꼭!

 
극락전: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2013년 4월 8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66호로 지정됐다.

 

 

 



 
세존사리탑: 1977년 4월 2일 석조 부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금동 사리기가 발견됐다. 직지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82년 12월 7일 국보 208호로 지정됐다.

 

 

 



 
3층석탑: 고려 중기의 석탑으로 보물 470호다. 높이는 330㎝. 모전석탑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경북에서 유행한 방단식 석탑형식과 상통하는 면도 있다고 보고 있다.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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