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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유생문(唯生門)과 사생문(死生門)

“죽어가는데 어찌할 건가? 염불하라”

오늘은 교판(敎判)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교판은 줄임말이고 갖추어 말하면 교상판석(敎相判釋)입니다. 교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놓고 해석하며 판단하는 일을 교상판석이라 하는데 간단하게 교판이라 말해옵니다.

교판은 불법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
정토종 교판은 쉬운 이행도에 해당
노병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

생사문 아닌 사생문인건 죽음 때문
그래서 유생문 사생문으로 나눈 것

이 순간에도 죽음은 쉼없이 다가와
죽음 인식해야 비로소 발심도 가능

정토종이라는 종파를 생각할 때 먼저 그 교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정토종은 불교 전체를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일까요? 정토종에서 내세우는 교판의 특징은 불교 전체를 크게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먼저 용수(龍樹) 보살이 세운 교판이 있습니다. ‘십주비바사론’이라는 책에서입니다.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나누었습니다.

정토종이 이행도이고, 다른 불교는 다 난행도입니다. 저 유명한 수로와 육로의 비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이행도는 수로를 통해서 배를 타고 가는 것처럼 힘이 들지 않고, 난행도는 육로를 걸어서 가는 것처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담란(曇鸞)스님의 교판입니다. 불교를 자력도(自力道)와 타력도(他力道)로 나누었습니다. 정토종 이외의 다른 불교는 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불하려고 하는 입장이므로 자력도이고,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여 왕생극락하려는 정토종은 타력도라고 본 것입니다.

담란 스님의 교판은 용수보살의 교판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담란 스님 스스로 원래 공(空)사상을 전공하였는데, 그때 읽은 책의 중요한 것은 다 용수보살의 저서입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이 두 분의 교판에서 조금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난행도와 이행도라고 할 때는 행(行)의 관점에서 나눈 것이고, 자력도와 타력도로 나눌 때에는 믿음(信)의 관점에서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대한 믿음을 중시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교판은 담란 스님의 제자 도작(道綽)스님이 제시한 것입니다. 불교 전체를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정토불교, 정토문, 정토종 등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도작 스님의 용어법을 따르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교판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토불교에서는 유효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토종의 입장에서 이제 새로운 교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아니, 사실 엄밀히 말씀드리면 교판이라 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살펴본 정토종의 세 가지 교판은 모두 다 경전을 두고 경전에서 설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고 하는 판단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제시하려는 교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토종의 입장에서 경전을 두고 불교사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일은 더 이상 새로운 용어가 나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용수, 담란 그리고, 도작이라는 세 분의 선구자들이 다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 더 무슨 새로운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의 교판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팔만대장경에 대해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 현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신앙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해석하고 판단해 본 것입니다. 아니 의식적으로 제가 그러한 작업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꾸만 보였을 뿐입니다.

지금 불교를 말하고 믿는 사람들의 불교관이라 할까요? 불교를 믿는 신앙태도라 할까요? 그것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오직 현재 살아있는 지금만 말하는 불교와 다가올 죽음이라는 사건과 지금의 삶을 함께 말하는 불교, 이렇게 두 개의 불교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불교는 유생문(唯生門)의 불교입니까? 사생문(死生門)의 불교입니까? 이렇게 저는 감히 여쭈어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유생문의 불교와 사생문의 불교를 말하면서도, 마치 교판인 것처럼, 교판을 제시한 분들처럼 그렇게 구분해서 말하면서도, 굳이 교판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원래 모든 불교는 다 사생문의 불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지금 이 생의 삶만을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없다고 하는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교의 첫 시작부터 잘 드러나 있습니다. 동서남북의 네 대문을 나가서 세상의 이치를 살펴본, 이른바 ‘사문유관(四門遊觀)’에서 싯다르타(석가모니 부처님) 태자가 본 것은 노인, 병자, 죽은 사람, 그리고 수행자가 아니었습니까? 거기서부터 이미 죽음이 있었습니다.

흔히 생노병사의 괴로움이라 말하지만, 노병사를 한 마디로 줄이면 사가 될 것입니다. 늙는 것이나 병든다는 것은 곧 죽음으로 결정(結晶)되고 수렴(收斂)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사라고만 말하게 됩니다. 생사대사(生死大事)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음을 말하는 것이 어찌 정토종만의 일이겠습니까? 모든 불교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바로 지난 번 편지에서 제가 말씀드린 무상, 고, 무아라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나 그 말들의 대승적 버전인 공(空)이라는 가르침에 죽음이 이미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무상, 고, 무아 그리고, 공이라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法印]을 우리 인간의 삶에 적용하면 무엇이 될까요? 노, 병 그리고 사가 아닐까요? 그 셋을 줄여 곧 죽음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사문이라 하지 않고 사생문이라 말하였습니다. 흔히 삶에서 죽음으로 간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직 미진한 인식이라 봅니다. 실제로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우리를 향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뚜벅뚜벅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불교 아닙니까?

그런데 왜 지금 우리 불교에서는 그렇게도 죽는다는 사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못 들을까요? 물론 삶이 중요해서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의 문제가 급선무라서 그렇습니다.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바로 그런 점을 위해서라도 부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말씀하신 것 아닐까요?

죽음을 깊이 인식할 때만이 우리는 발심할 수 있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소중히 하고, 그 삶 속에서 부처님의 길을 밟아 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 눈에는, 제 귀에는 지금 우리 한국불교에서는 바로 그렇게 죽음을 말하는 불교가 잘 안 보입니다. 잘 안 들립니다.

그래서 불교를 유생문과 사생문으로 나누어 본 것입니다. 다른 모든 불교도 다 기본적으로 사생문인 것으로 저는 봅니다만, 그런 중에서도 정토종이 가장 핍진(逼眞)하게, 꽉 차게 사생문인 것이 아닐까요? “나무아미타불”이라 할 때, 우리는 아미타불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그 아미타불은 우리가 죽어서야, 내생에 가서야 만나는 것으로 말해지는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을 말하는 정토종은 언제나 “죽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라”, “죽음을 기억하라”고 우리 이마에 ‘죽을 死’자 한 자 써 붙여 주는 불교입니다. 죽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묻습니다.

그대 죽는데 지금도 죽고 있는데, 죽음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 대답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생문의 대표선수 정토종의 불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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