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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연구회 ‘깨달음 논쟁’-4. 삼론종의 깨달음

삼론종 깨달음, 궁극적 경지인가 점진적 과정인가

▲ 조윤경 교수는 “삼론종에서 깨달음은 궁극적인 경지이며, 불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깨달음은 있을 수 없고,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여러 과정들은 어디까지나 중생의 인식에 관계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인도 마하보디 대탑. 법보신문 자료사진

삼론종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삼론종의 삼중이제(三重二諦)나 사중이제(四重二諦)와 같은 중층적 형식의 교설로 인해, 삼론종에서의 깨달음 역시도 단계별로 사견을 제거해나가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심지어는 무한한 단계가 파생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삼론종에서 깨달음의 점수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깨달음의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모습을 희석시킨다.

삼론 교학에서 깨달음을
단계적 과정으로 설명해
점수측면으로 이해하지만
그 과정은 중생교화 방편
깨달음, 궁극적 경지일 뿐

삼론종에서 깨달음은 중도의 실상에 대한 궁극적 체득이다. 여기에서 중도는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 경지가 아니며, 깨달은 자에게는 현실세계가 그대로 중도이다. 중국 남조 당시 삼론종은 대승불교의 진정한 구현자라는 정체성을 표방하면서 그들은 기존 남조 교단에서 유행하던 성실학을 소승으로 규정하고, 그것과 차별되는 대승보살의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삼론종에서 추구한 깨달음이 분별인식을 완전히 떠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평등하게 바라보는 궁극적 경지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론종이 깨달음을 궁극적이고 완전한 것이라 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여러 단계의 가르침을 설정하여 이를 통해 중생을 교화시키는 까닭에, 혹자는 깨달음이라는 이상과 단계적 가르침이라는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지 않은지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삼론종의 단계적 가르침은 모두 궁극적이고 일회적인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방식이며, 이는 삼론종에서 궁극적 깨달음과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단계적 가르침이 조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삼론종의 대표적인 교화 형식으로는 초장과 중가를 꼽을 수 있다. 초장은 삼론종에서 ‘처음 배우는 장문(章門)’, 즉 가장 초보적으로 배우는 교의의 형식이다. 그리고 중가는 중도와 가명을 함께 지칭하는데, 초장을 배워 마음 속 거친 장애가 제거된 자에게 중가의 가르침을 펼쳐서 불이중도를 깨닫도록 인도한다.

삼론종에서의 모든 가르침은 언어문자의 표층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실질적으로 담보하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삼론종에서 모든 가르침은 중도로 향하고, 중도를 가리키지 못하면 가르침으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불이중도와 가명과의 밀접한 상관성을 뜻하는 중가의(中假義)는 삼론종의 가장 핵심적인 교설임이 자명하다. 이렇듯 중가가 삼론종의 가르침과 깨달음 사이에 가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데, 별도로 초장의 입문적 가르침을 설정하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삼론종에서 초장은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준비단계이고, 중가야말로 본격적인 깨달음의 궤도라고 할 수 있다. 삼론종에서 깨달음으로 곧장 향하는 가명 이전에 초장이라는 개괄적인 단계를 제시한 까닭은 현상에 대한 의심을 발생시켜 대상의 뿌리 깊은 집착을 흔들어놓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초장에서 발생한 자성에 대한 흔들림은 수행의 첫걸음일 뿐이고, 그것만으로는 깨달음을 보장할 수 없다. 깨달음은 막연한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초장이 깨달음에 정확한 표적을 겨누고 있지[的當] 않은 모호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비유하면 범어의 ‘아(阿)’자가 첫 음과 끝 음을 관통하듯이 초장의 머물지 않는[不住] 속성은 교화의 처음뿐 아니라 깨달음까지도 관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장이 중가로 이어지는 한, 초장 또한 넓은 의미에서 깨달음으로 포섭되고 긍정된다.

이제 여러 중가의 교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삼중이제의 프레임을 통해 삼론종의 깨달음이 어떻게 현현되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삼중이제는 삼종이제(三種二諦)라고도 표현되는데, 섭령흥황의 오래된 전통을 길장이나 혜균 등이 계승한 것이다. 삼중이제의 각 설법은 모두 교화자가 대상이 처한 현실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들을 궁극적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의 산물이기도 하다.

길장은 삼중이제의 각 단계가 각각 범부, 이승, 보살을 위한 설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법화현론’뿐만 아니라, ‘이제의’와 ‘십이문론소’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난다. ‘이제의’에서는 “범부는 ‘제법이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제법이 있음은 속제이고, 공함이 진제'라고 말한다”고 밝히는데, 이 첫째 단계의 이제는 범부의 유견(有見)에 대응하여 깨달음을 설법하는 가르침이다. 반면, 이승은 ‘제법이 공하다’라고 여겨서 공견의 구덩이에 빠져 있다. 이러한 이승의 단견을 논파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공과 유는 모두 속제이고 중도가 진제'라는 둘째 단계의 이제를 설법한다. 마지막으로 보살 가운데 중도에 얽매인 자들이 있는데, 삼론종에서는 이들을 ‘유소득보살(有所得菩薩)’ 혹은 ‘유득보살(有得菩薩)’이라고 지칭한다. 이들은 범부와 이승은 유와 공, 생사와 열반 양변에 얽매이지만 자신은 중도에서 노닌다고 여긴다. 이러한 보살의 유소득 집착을 논파하여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 셋째 단계의 이제를 설법한다.

그렇다면 이 세 단계의 이제는 깨달음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인가? 히라이 슌에이는 삼중이제가 범부·이승·유소득 보살의 세 인연에 대해서도 단계적으로 설법된 것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이것은 한 대상을 교화하는 점사의와 여러 다른 근기에 대한 설법을 동일시한 것과도 관련된다. 이들의 관점은 범부, 이승, 유소득 보살 간의 차별적 근기로 인해 삼중이제(사중이제)의 각 교설이 진실함을 담아내는 정도도 다르고, 각 단계는 다시 타학파들의 이제설과도 연관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삼론종이 이들의 견해처럼 범부와 이승과 유소득 보살의 근기를 연속적인 단계로 파악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삼론종에서는 삼중이제가 설법하는 대상의 근기는 다르지만 하나의 궁극적 깨달음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삼중이제는 여러 근기에 알맞은 세 가지 방편을 설정함으로써, 모든 근기가 가르침을 통해 궁극적으로 깨달을 수 있음을 역설한다. 길장의 말을 빌리자면 삼중이제는 모두 궁극적인 일승(一乘)과 일도(一道)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면 현상적인 차별이 완전히 소멸되고 삼종이제의 대상이 되었던 세 인연이 모두 평등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범부와 성인의 차이도 사라지고[非凡非聖], 대승과 소승의 구분도 무의미해진다[非大非小].

한편, 길장은 ‘중관론소’에서 앞의 세 근기(범부, 이승, 보살)에 대한 삼중이제와 전혀 다른 체계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보살의 계위 안에서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에 대한 설법으로서의 사중이제이다. 앞의 해석에서는 각 단계가 따로따로 각 대상에 상응했다면 이곳에서는 단계가 중첩될수록 낮은 근기의 보살에 대한 설법이 된다. 구체적으로 상근기의 보살은 초중이제(初重二諦)만 들어도 바른 도[正道]를 깨닫기 때문에 다음 단계가 필요하지 않고, 중근기의 보살은 초중이제를 듣고서 바로 깨닫기는 힘들지만 둘째 단계의 이제를 들으면 도에 들어갈 수 있고, 하근기의 보살은 세 단계의 이제를 모두 듣고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 체계는 설정하고 있는 교화대상의 범위도 다르고, 서로 가르침을 접근하는 시각에 차이가 있으므로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삼중이제의 각 단계의 가르침은 그 단계가 올라갈수록 근기가 높은 대상에 대한 설법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근기가 낮은 대상에 대한 설법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지점은 삼중이제가 깨달음에 단계별로 한 발짝씩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 될 수 있다. 사실 삼중이제의 각 단계들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대상의 근기와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변용되면서 여러 다양한 의미로 나타나는 동시에 궁극적인 깨달음을 나타내는 선교방편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가르침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으며, 누구든지 방편을 깨닫는 순간은 바로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삼론종의 단계적 가르침을 대표하는 초장과 중가 및 삼중이제가 깨달음을 어떻게 구현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초장은 중가 이전의 설정된 개괄적인 가르침으로 일반인들로 하여금 현상에 대한 의심을 생성시키지만, 이 의심은 특정한 방향성이 없이 거친 집착들을 제거하기 쉽게 흔들어놓기만 한다는 점에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특정 대상의 상황에 맞게 적확한 가르침을 펼치는 중가의 단계에서는 집착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냄으로서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한다.

깨달음과 직결되는 중가의 가르침 중에도 여러 단계들이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삼중이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삼중이제의 각 단계들의 작동 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점진적인 단계들도 사실은 교화대상이 집착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고 미혹된 것에서 비롯된 현상적인 결과일 뿐, 각 단계는 모두 궁극적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삼중이제의 각 단계는 여러 근기의 중생을 대치하여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설정된 방편이기도 하다. 이 때 세 가지 층위의 가르침은 설법하는 근기에 따라 가르침의 종류를 차별화한 것이지, 어느 한 가르침이 다른 한 가르침보다 높은 수준의 것은 아니다. 이처럼 삼중이제의 각 단계는 궁극적 깨달음으로 향하는 선교방편의 문을 활짝 열어 교화대상을 일승과 일도로 이끄는 점에서는 모두 공통된다.

▲ 조윤경 교수
삼론교학에서 여러 다양한 형태의 교설이 있고 그 중 일부는 점진적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삼론종에서 가르침은 결국 깨달은 자의 지혜가 중생에게 구현된 것이며, 전체가 모두 궁극적 깨달음을 담보하고 있다. 결국 삼론종에서 깨달음은 궁극적인 경지이며, 불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깨달음은 있을 수 없고,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여러 과정들은 어디까지나 중생의 인식에 관계된 것이다. 삼론종에서 단계적 가르침은 궁극적 깨달음이 현실세계의 다양성에서 구현되는 방식의 하나로서, 깨달음에서 점진적 가르침의 의미를 다시금 환기할 필요가 있다.

조윤경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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