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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백월산의 미륵과 아미타

기자명 주수완

결함마저도 신화로 승화시키는 신라인의 설득력이 걸작 비결

▲ 감산사 금당주존 미륵존상, 719년.

‘삼국유사’ 탑상편의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달달박박”과 “남월산(南月山)”은 모두 아미타와 미륵을 함께 다룬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침 하나는 백월산, 하나는 남월산이라는 ‘달’과 관련된 비슷한 이름을 달고 있는데, 앞의 백월산은 온통 판타지로 가득 차있고, 다음의 남월산은 철저한 다큐멘트이다.

미륵불과 아미타불 됐다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

경덕왕때 백월산 남사 세워
각각 불상으로 조성해 경배

부족한 물에 목욕한 까닭에
달달박박 성불 때 금색 부족
불상에 얼룩 남아있는 이유

이들 불상 현재는 볼 수 없어
다만 광배 명문은 기록 남아

걸작 작은 흠결 신화로 남아
풍부한 상상력 선물로 제공

먼저 백월산은 지금의 창원군에 있는 산으로서 특이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황제가 연못을 팠는데, 이상하게 보름달만 뜨면 그 근처에는 없는 산 하나가 연못에 비치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 산을 그대로 그리게 하여 사방에 사람들을 보내어 그것과 똑같은 산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오도록 했다. 결국 한 사람이 바다 건너 우리나라의 창원 백월산을 발견하고 그것이 똑같은 산이라 생각되어 꼭대기에 신발 한 짝을 걸어놓고 당으로 돌아갔는데,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고 보름날 연못에 비친 산을 보니 정말로 그가 걸어놓은 신발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매우 낭만적이고 신비로우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이다. 꼭 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중국은 동쪽의 우리나라를 매우 신비함이 가득한 나라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여하간 이 산 동남쪽 마을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두 절친이 살았는데, 처자까지 거느린 사람이었지만 그 뜻은 늘 불도를 닦는데 두어 결국 20세에는 ‘법적방’이란 곳에서 출가하였다. 그래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불도를 병행했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은 서쪽에서 부처님의 광명이 다가오고 그 빛 안에서 금빛 팔이 나와 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꿈을 동시에 꾸게 되었다.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알고 이들은 이윽고 속세를 버리고 용맹정진하기로 결심하여 백월산으로 들어갔다. 금빛 팔이란 부처님 팔인데 부처님께서 이마를 만져주셨다는 것은 관정수계(灌頂受戒), 즉 직접 제자로 받아들이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감산사 강당주존 아미타상, 719년.

달달박박은 백월산 무등곡 북쪽 고개에 판자로 ‘판방’이란 암자를 지어 아미타불을 모시며 수행했고, 노힐부득은 동쪽고개에 돌을 쌓아 ‘뇌방(磊房)’을 만들어 미륵불을 모시며 수행했다. 그러던 중 성덕왕 8년(709년) 어느 날 갓 스무 살의 아리따운 여인이 달달박박의 판방 문을 두드렸다. 길을 가다 날이 저물었으니 하루만 재워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달박박은 그녀가 수행에 방해가 되니 “자신을 시험하지 말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 여인은 똑같이 노힐부득의 뇌방 문도 두드렸다. 이에 부득은 “그대는 어디서 오는 길이오?”하고 물었는데, 이에 대해 그 여인은 “실은 길을 잃어 머물 곳을 찾는 게 아니라 그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려 함이니 내 청만 들어주시고 누군지는 묻지 마시오”라고 답했다. 이에 부득은 여하간 어두운 산에 여인 혼자 둘 수는 없으니 머물다 가라며 방에 들어오게 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산기가 있다며 아이를 낳았는데, 부득은 그녀의 출산을 도왔고, 이어 그녀가 목욕을 원하자 목욕물도 데워주었다. 이에 그녀가 목욕통 안에 들어가니 갑자기 물이 금빛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인은 부득에게 함께 들어와 목욕하길 권하니 부득은 신비하여 그 물에 몸을 담갔는데 그러자 곧 미륵불의 금빛 몸을 얻어 성불하게 되었다. 실은 그녀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는데 노힐부득의 성불을 도우러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단호하게 여인의 유혹을 뿌리친 달달박박은 아마도 부득은 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라 믿고 놀려줄 생각에 부득의 뇌방을 찾았는데 도리어 그는 성불하여 미륵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박박은 자신이 유혹을 뿌리치느라 그만 그 유혹의 경계 자체를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반성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마음의 흔들림도 없이 여인을 맞이했던 부득을 부러워했다. 그러자 부득은 아직 목욕통에 금빛 물이 남았으니 박박도 몸을 담가보라고 권했는데, 그대로 하자 박박 역시 성불을 이루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이 설화는 단순한 성불 설화 같지만, 성불을 이룬 부처가 다름 아닌 미륵불과 아미타불이라니 이 설화의 당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미륵불과 아미타불이 우리나라에 나타나신 것인가? 아미타불은 이미 성불하신 분이고, 미륵불은 오지도 않으셨다. 그럼에도 이런 설화가 생겼다는 것은 여하간 당시 사람들이 이 설화를 믿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었을까? 힌트는 어쩌면 당나라 궁중 연못에 백월산이 비쳤다는 도입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땅은 말하자면 물리학에서 말하는 차원을 이어주는 통로인 웜홀 같은 것으로 인도나 중국과 연결되어 있어 시공을 초월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월산이 웜홀을 통해 중국 황제의 궁정 연못에 비췄던 것이다. 미륵불도 아미타불도 모두 이 공간을 타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던 셈이다.

▲ 내소사 대웅보전의 대들보에서 첨차가 빠진 부분.

반세기가 지난 757년, 경덕왕은 이 설화를 기념하여 이곳에 백월산 남사(白月山南寺)라는 절을 세웠다. 공사는 764년에 끝났는데 이어 금당에 미륵불을 강당에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특이한 것은 아미타불이 미륵을 뒤이어 성도할 때 목욕통의 물이 부족하여 온몸이 금색으로 변하지 못하고 “얼룩진 부분이 있었는데 불상도 그랬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어찌 아미타불이 성불하시는데 목욕물이 모자라 얼룩진 불완전한 아미타불이 되셨다는 말인가? 이는 틀림없이 경덕왕대에 만들어졌다는 아미타불이 어느 시점이 되어 점차 도금한 부분이 벗겨지자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많은 전설들을 보면 누군가 멋진 작업을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 며칠만 날짜를 달라고 하고는 절대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람들이 꼭 약속한 날 전날 밤에 문을 열어보는 바람에 일이 미완성으로 끝났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어떤 작품이 지닌 결함을 미화시키기 위한 전형적인 설화 만들기 작업이다. 허접한 작품이라면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테지만, 너무 훌륭한데 결함이 보이니 안타까워 사람들이 지어준 이야기가 아닐까. 비슷한 이야기가 부안 내소사에도 전하는데, 목수가 건물은 짓지 않고 부지런히 목재만 다듬는 것을 보고 놀려주려고 부재 하나를 숨겼다는 이야기나 이후 벽화 단청을 하는데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던 100일의 99일째에 문을 열자 단청하던 새가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 등이다. 목수는 결국 첨차 하나를 빼고서도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실제 내소사 대웅보전의 대들보에는 첨차가 하나 빠진 곳이 있어 이를 두고 만들어진 설화임을 알 수 있다.

▲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당의 주존 항마성도상은 이처럼 가사를 둘러 불상의 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설화의 원형은 멀리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지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 봉안되어 있었던 항마성도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어떤 브라만과 승도들이 마하보디 사당에 석가모니 성도상을 만들어 봉안하려고 했는데, 이때 신비한 조각가가 나타나 재료와 등불을 사당 안에 넣어주고 6개월만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훌륭한 성도상을 만들어 놓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4일을 남겨놓고 궁금함을 참지 못해 그만 문을 살며시 열어보는 바람에 이 역작은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장인은 다름 아닌 미륵보살의 화신이었고, 사람들은 그 미완성된 부분을 가리기 위해 불상의 몸에 목걸이 같은 장엄을 걸쳐 두어 그곳을 가렸다. 지금의 마하보디 사당 안에 모셔진 성도상은 그때의 불상은 아니지만, 지금도 비단옷으로 부처님을 감싸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 그때부터 내려오던 전통이 아닌가 한다.

유명한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는 “걸작이란 그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결점마저도 이해시킬 수 있는 설득력 때문에 걸작이 된다”고 했다. 일전에 말씀드린 석굴암 천정돌의 균열이나 백월산 아미타불의 얼룩진 흔적도 결코 이들 걸작의 위대함을 감추지 못했고, 오히려 신화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아쉽게도 백월산의 금당 미륵존상과 강당 아미타불상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대신 ‘탑상’ 남월산편에는 감산사라는 절의 금당에 봉안되어 있던 미륵존상과 강당에 봉안되어 있던 아미타불의 광배에 새겨져 있던 명문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감산사 불상은 719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경덕왕이 조성했다는 백월산 남사의 상보다는 이르지만, 실제 부득과 박박 스님의 성불이 있었던 709년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이니, 그 중간에 걸쳐 있다 하겠다. 또한 금당에 미륵, 강당에 아미타불을 봉안하는 방식은 백월산 남사의 경우와 동일한 것이다. 다행이 일연 스님이 보고 기록에 남긴 이 남월산 감산사 불상들은 현재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스란히 만나볼 수 있다. 보통은 글로만 남아있고 작품이 없거나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아주 드물게 작품과 기록이 동시에 남아있는, 그래서 특이한 사례이다. 그러나 소상한 명문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에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다. 상상력 메이커 일연 스님도 이 장황한 문자 사료 앞에서는 그저 기록하기만 하셨으니, 정확한 기록은 상상력을 잠들게 하는가 보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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