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본래 한 물건도 없다!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42. 본래 한 물건도 없다!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 정운 스님
  • 승인 2017.11.2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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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곧 마음이며 본래 공한 것일 뿐

원문: 배휴가 물었다. “화상은 지금 법을 설하고 계시거늘 어찌하여 승도 없다 하고, 법도 없다고 하십니까?” 선사가 답했다. “그대가 만약 법에 설할 것이 있다고 본다면 ‘곧 음성으로 나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내’가 있다고 보면, 곧 처소가 있다는 뜻이다. 법도 또한 무법(無法)이며, 법이 곧 마음이다.…실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이름 해서 ‘도량에 앉는다’고 한다. 도량이란 다만 이 모든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법이 본래 공임을 깨닫는 것이니, 이것을 공여래장이라고 부른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번뇌가 있을 것인가?’ 만약 이 가운데서 뜻을 얻는다면, 소요일 뿐 무슨 논할 것이 있겠는가?” 배휴가 물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하는데, 물건이 없다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선사가 답했다. “없다고 해도 맞는 것이 아니다. 보리는 일정한 장소가 없으며, 알음알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라 붙일 것조차 없기에
단순하게 한 물건이라고 한 것
도량이란 물리적 장소 아니라
선법으로 발심해 깨 있는 경지


해설: ‘도량에 앉는다’는 내용은 ‘유마경’의 ‘보살품’에 나타나 있다. 광엄동자가 베살리성을 나가려고 하는데, 유마힐이 성으로 들어온다. 동자가 유마에게 ‘어디로부터 오느냐?’고 묻자, 거사는 ‘도량으로부터 온다’고 답한다. 동자가 ‘도량이 어느 곳이냐?’고 묻자, 유마가 이렇게 말한다.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도량이며, 깊은 마음이 도량이고, 6바라밀·4섭법·4무량심·18불공법 등이 모두 도량입니다. 보살이 바라밀로써 온갖 중생을 제도하면, 손을 들고 발을 내리는 위의가 모두 도량으로부터 와서 불법에 머무는 것입니다.” 곧 모든 행 하나하나가 불심에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가 도량에 있는 것이다. 도량이란 물리적인 어떤 장소가 아니라 선법(善法)으로 발심해 늘 깨어있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소요일 뿐 무슨 논할 것이 있겠는가?’에서 소요는 도교 용어다. 도교는 중국의 자생 종교로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속신앙이나 다름없다. 5세기 초 구마라집(344~ 413)의 한역 이전을 격의불교라고 하는데, 도교 사상에 견주어 불경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8세기 중기 형성된 조사선은 중국적인 사유[도교]가 깃들어 있어 선에 도교적인 용어나 문구가 더러 있다. 여기서 소요의 뜻은, 선에서 해탈한 상태를 ‘일을 마쳤다’고 해서 ‘요사(了事)’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소요를 해탈해 마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곧 해탈해 마치고, 유유히 거닐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소요는 십우도의 한 경지에 비견된다. 남송시대, 곽암의 십우도는 자신의 마음[번뇌]을 소[牛]에 비유하여 번뇌를 조복 받고 길들여[牧牛] 완전한 해탈 경지에 이르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십우도 가운데 일곱 번째가 망우존인(忘牛存人)이다. 이는 수행해 깨달은 뒤 집에 도착해서 소와 목동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번뇌가 남아 있지 않은 단계로서 평상심과 무사·무심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바로 소요라는 경지가 십우도의 이와 같은 상태라고 본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번뇌가 있을 것인가?’는 육조 혜능이 증득한 견처를 스승에게 보인 게송 중 일부분이다. 원문에서 배휴도 황벽에게 말하듯이 그 한 물건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맞지 않다. ‘유마경’에서 사리불이 불이(不二)에 대해 유마힐에게 물었을 때, 유마는 묵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이와 같은 이치라고 본다. 어떤 명칭이라고 붙일 것조차 없기에 단순히 한 물건이라고 명칭한 것이다. 그래서 황벽도 바로 없다는 것조차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의 어록에서도 나왔듯이 법은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으며, 그 어떤 것이라고 이름붙일 것도 없는데, 하물며 깨달음이 어느 장소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이를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 없다. 일체 유위적인 존재가 모두 공하거늘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이에 수행도 증득도 없는 것[無修無證]이니, 수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 본래 성불은 곧 닦음과 깨달음이 하나[修證不二]라는 남송대 묵조선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임제종 간화선을 지향했던지라 묵조선을 언급하지 않지만, 실은 조사선 사상의 흐름은 묵조선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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