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저술 중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는 대승불교의 신앙지침서로 평가받는 명저로 손꼽힌다. ‘소(疏)’라 한 이 저술이 중국에 전해질 때 당나라 학승들은 ‘논(論)’으로 추앙해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 칭했다. 불교 발상지 인도에서 편찬·저술되지 않은 문헌을 ‘논’이라 부른 것은 ‘금강삼매경론’이 최초다. 이 논서는 ‘각승(角乘)’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소(牛)의 등에 앉아 두 뿔 사이에 작은 경상 하나 걸쳐 놓고 이 논을 지었기 때문이다.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논문을 쓴 격이니 원효는 천재 중의 천재다.
당나라의 서당 지장(西堂 智藏)으로부터 인가 받고 귀국한 도의(道義)는 전남 장흥 땅 보림사에서 남종선을 열어 보였으나 교종에 매료돼 있던 대중들은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직 때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아 챈 도의는 보림사를 나와 설악산 억성사로 들어 가 나오지 않았다. 끝내 염거(廉居)에게만 법을 부촉한 채 설악산 진전사에서 입적했다. 염거 또한 선연(禪緣)이 닿기를 기다리며 수행에만 힘쓰고 있던 차에 체징(體澄)이 찾아왔다. 체징의 법기를 간파한 염거는 그 자리에서 선법을 펼쳐 보였고, 체징은 단박에 선의 요체를 터득했다. 체징으로부터 일어 난 선풍(禪風)은 통일신라 땅을 웅대하게 흔들었다. 하여 한국 선의 1조는 도의요 2조와 3조는 염거와 체징이다.
해발 3,000m가 넘는 중국 오대산에서 위법망구의 심정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면 자장은 결코 부처님 사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리가 이 땅에 전해졌기에 영축산, 오대산, 설악산, 태백산, 사자산 자락에 한국대표 5대 적멸보궁이 들어설 수 있었다.
석옥 청공(石屋 淸珙)의 법을 이은 태고(太古)가 있었기에 고려 땅에 임제선이 웅지를 틀 수 있었다. 또한 추사 김정희와의 논쟁에서 촌철살인의 일언들을 꽂아 넣으며 선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 백파(白坡)가 있었기에 숭유억불의 조선에서도 선기(禪機)만은 웅혼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문헌과 금석문, 역사적 사실 등을 입체적으로 고찰 해 꼼꼼히 적어 놓은 ‘역주’가 일품이어서 불교 인물사적 자료 가치도 높다. 선(禪)의 바람과 교(敎)의 파도가 이는 법해(法海)를 항해해 보시라! 누구든 진보(珍寶) 하나쯤 건져 올릴 게 분명하다. 3만원.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418호 / 2017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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