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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묘희세계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버려라!-중

진리 응축한 한마디 말, 끊임없이 달라진다

▲ ‘일세계즉대천세계(一世界卽大千世界)’ 고윤숙 화가

어떤 학인이 운문에게 물었다.

장님들이 코끼리 달리 말하지만 다 진실
가짜 없기에 어느 것 진짠지 묻는 건 잘못
한마디 말 진리지만 집착하면 죽은 세상

“한마디 말로 남김없이 말한 경우라면 어떻습니까?”
“갈가리 찢어버려라!”
“화상께서는 어떻게 집어 담으시겠습니까?”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가져오너라.”

한 마디 말로 남김없이 말한다 함은 세상의 진리를 한 마디 말로 응축하여 표현함을 뜻한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는 한 마디 말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소설가 보르헤스가 수많은 책들을 뒤져 평생 찾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 게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마술적인 하나의 문장.”(‘알렙’의 ‘신의 글’, 165) 혹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단 한 줄의 시(‘셰익스피어의 기억들’의 ‘거울과 가면’, 87). 그는 이를 우주의 모든 책들이기도 한 한 권의 책(‘모래의 책’, ‘바벨의 도서관’), 모든 별이기도 한 하나의 별, 모든 사람이기도 한 한 명의 사람(‘알모따심으로의 접근’)이란 말로 바꾸어 쓰기도 한다.

진리란 단순한 것이라는 믿음은 과학자들의 믿음만은 아니다. 선사들 또한 진리란 단순하고 간결한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다른 종류의 단순함이지만. 그래서 수많은 경전의 말들을 한 마디로 응축하여 표현하려 한다. 경전을 보는 대신 그 한 마디만 부여잡고 밀고 나감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도록 가르치고자 한다. 심지어 운문은 학인들의 물음에 단 한 자의 글자로 답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 글자에 모든 걸 담을 때 발생하는 강한 응축의 힘, 그 더없는 강도로 학인들의 통념이나 견식들을 깨주려는 것이다.

한 마디 말로 남김없이 말한다는 것은 한 마디 말에 세상 전체를 담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담는 그 ‘한 마디’말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선사들마다, 아니 선사들이 학인들을 만나 말을 할 때마다 다른 말로 전체를 담는다. 가령 ‘평상심’이란 말로 세상의 진리를 담을 때도 있고, ‘본래면목’이란 말로 담을 때도 있으며, ‘바리때’란 말로 담을 때도 있고, 손가락 하나에 담을 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선사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용수는 ‘공’이란 한 마디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남김없이 말했고, 무착과 세친은 ‘식(識)’이란 한 마디에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아 말했다.

이렇게 다들 한마디 말로 세상의 진리를 남김없이 말했지만 그 말로 말해진 진리는 결코 같지 않다. 평상심이란 말에 담긴 세상과 본래면목이란 말에 담긴 세상은 각각이 모두 전체 세상이지만 같은 세상이 아니다. 바리때에 담긴 세상과 손가락 하나로 세워진 세상 또한 같지 않다. 그 각각이 세상 전체임엔 틀림없지만 각각이 다른 세상임 또한 틀림없다. 그 중 어느 것이 진짜라 할 것이고 어느 것이 가짜라 할 것인가! 그 중 어느 하나에 담긴 것이 유일한 진리라 믿을 때, 그 한 마디 말은 다른 수많은 진리, 수많은 세상을 가리는 장막이 된다. 거짓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그 말에 머무는 순간 그것은 세상을 죽이는 말이 된다. 선사들이 말하는 사구(死句)란 원래 ‘죽은 말’이란 뜻이지만, 그렇게 죽은 것에 세상을 담아 죽이는 것이란 점에서 ‘죽이는 말’이기도 하다.

하여 한 마디 말로 남김없이 말한 경우라면 어떡하느냐는 물음에 운문은 말했던 것일 게다. “갈가리 찢어버려라!” 남김없이 말했다는 생각을 찢어버리고, 남김없이 했다는 한 마디 말을 찢어버리고, 그 한 마디 말이 만든, 세상을 가리는 장막을 찢어버리란 말일 터이다. 찢어버린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찾아야 한다. 세상의 진리를 남김없이 말할 또 다른 한 마디 말을. 불도란 불법(佛法)이나 불도(佛道)를 구하는 자이고, 불법이나 불도를 구한다는 것은 어떻든 세상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니, 손에 들고 있던 한 마디 말이 찢어져 흩어졌다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학인은 다시 물었을 것이다. 한 마디 말을 찢어버린 후 흩어진 것을 어떻게 다시 모아 담겠느냐고.

운문은 답한다.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가져오너라.” 흩어진 게 쓰레기란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을 다시 모아 세상의 진리를 남김없이 말할 한 마디 말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앞서 남김없이 말한 한 마디 말을 찢어버리라 했지만, 한 마디 말로 남김없이 말하려는 시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찢어버렸으니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다시 찾은 한 마디 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다시 말하고 다시 찾고 또 다시 말하는 것들이 끝없이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한 마디 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응축될 수 있지만, 끝없이 다른 말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얼굴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의 세계가 바로 그대로 대천세계(大千世界)인 것이다.

‘장님 코끼리 더듬기’라는 잘 알려진 얘기에 대해 조주가 했던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제각기 다르게 말하는데, 무엇이 진짜 코끼리입니까?”
“가짜 코끼리는 없다. 잘못[가짜로] 알고 있는 것은 너다.”(‘조주록’, 108)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같다 하고, 코를 만진 장님은 뱀같다 하는 식으로 각자 다르게 말했다는 얘기를 두고 대개는 코끼리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눈먼 자들의 착각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진짜 코끼리는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조주는 단호하게 말한다. ‘가짜 코끼리는 없다’고. 장님들이 더듬어 알아낸 것 각각이 모두 코끼리의 실상에 대한 진실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400~700나노미터 파장의 가시광선만으로 세상을 보지만, 새들은 자외선이 섞여 들어간 세상을 보고 뱀들은 적외선이 배어든 세상을 본다. 박쥐는 초음파로 사물을 식별하고 개구리눈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인가?

가짜 세계는 없다. 모두가 진짜 세계다. 자신의 감각과 생존방식에 적합하게 파악한 진짜 세계다. 마찬가지로, 바리때에 담은 세계와 손가락 하나로 세운 세계, 공이란 말에 담은 세계와 식이란 말에 담은 세계가 모두 다르지만, 그 중 어떤 것이 진짜 세계냐고 묻는다면 어리석은 질문이 될 것이다. 가짜 세계는 없다. 다만 그 중 어떤 게 진짜일까를 묻는 이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남김없이 말한 한 마디를 찢어버리고, 다시 다른 한 마디 말을 찾는다 함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찾고 찢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함은 그때마다 다른 세계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운문에게 물었던 학인처럼, 남김없이 말하는 ‘한 마디’를 묻는 질문은 부처를 묻는 것처럼 흔한 일이었던 것 같다. 갈가리 찢어버리라는 운문의 말이 놀랄 만큼 강렬하다면, 그에 대한 조주의 말은 익살스러운 위트가 넘친다. 

“무엇이 한 마디입니까?”
“무어라 하였느냐?”
“무엇이 한 마디입니까?”
“두 마디가 되었구나.”(‘조주록’, 106)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18호 / 2017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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