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7.12.11 월 10:51
> 연재 | 대만 성운대사의 나의 인생 나의 불교
88. 생사란 무엇인가-상“사계절이 순환하듯 삶과 죽음도 순환할 뿐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  beop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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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5  13: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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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 캠프에 참석한 청소년 불자들과 성운대사. 대만 불광산 제공

"죽음을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지극히 담담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기계’가 낡았으니 새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서 죽기를 바라는 노인이 있기도 합니다. 사람의 죽음은 마치 옷을 갈아입고 집을 새로 짓는 것과도 같은 것이므로 달리 유난스러워 할 거리가 안 됩니다. "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신은 좋아합니까?

옛 사람들은 “죽음을 돌아가는 것으로 여기”라고 했는데 죽음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당연히 기뻐해야 할까요, 아니면 두려워해야 할까요? 이는 우리들이 생각하고 판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교적 견해는 사람은 죽었다고 없어지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것으로, 태어나고 죽는 순환을 하기 때문에 ‘노병사생(老病死生)’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면 늙기 마련이고 늙으면 병이 나기 마련이며 병이 나면 죽게 되고 죽으면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동서남북이 있듯이 동서남북을 따라서 돌게 되면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돌아오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제가 동쪽으로 가려고 대만 타오웬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타면 18시간의 비행 후에 도착할 것이고 다시 계속해서 비행을 하여 18시간의 비행을 거치면 다시 타오웬 공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의 마지막은 출발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죽게 되고 죽으면 태어나게 되는 것으로, 이는 필연적인 이치이자 진리인 것입니다. 단지 우리네 사람들은 어리석고 몰라서 사람이 태어날 때는 온 가족 모두 다 “아들, 딸을 낳았네요”라고 하면서 축하를 해줍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면 죽기 마련인데 죽을 때가 되어서야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 죽게 된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이후에는 또 다시 태어나게 될 텐데 다시 태어나는데도 사람들은 어찌해서 슬퍼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생사 문제의 견해에 대한 인생에서의 가치를 새롭게 추정해야 합니다.

마치 우리들 마음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는 것처럼 한 생각이 일어나서 머무르기도 전에 그 생각은 변화하고 없어져 버립니다. 바로 이어서 또 다른 한 생각이 생겨나고 그 생각에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 또한 이러하니 태어나서 죽고 죽으면 태어나면서 끊이지 않습니다. 또 예를 들면 계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겨울이 왔으면 봄이 멀었을까를 걱정할까요? 물질적인 것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기 마련이며 빈 공간이 있으면 건물을 지을 수 있고 건물이 낡고 부서져서 공간이 생기면 또 건물을 다시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높은 건물을 짓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으며 또한 무너져버려서 다시 짓는 건물도 그 얼마나 많습니까? 죽고 태어나는 생사도 이와 같은 순환이라는 것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려서 출가한 저는 역대 조사 스님들의 왕생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입적하실 때를 미리 예견하신 분도 계시고 스스로 추도하신 분도 계시며 언제쯤 작별할 것이라고 미리 여러 곳에 알리신 경우도 있습니다. 죽음을 놀이로 삼으신 분도 계신데 비석(飛錫) 선사께서는 물구나무를 서서 입적하셨고 보화(普化) 선사는 사대문을 돌아다닌 뒤 입적하셨습니다. 절집에서 이런 이야기가 너무 많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전란을 겪으면서 시신 옆에서 잠이 들기도 하고 죽어있는 군인들의 시신이 산을 이룰 정도는 아니어도 사방에 널려 있다 보니 죽음에 대해서 그리 두려운 생각이 없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지만 죽는 그 찰나, 그 순간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의 고락(苦樂)은 각기 달라서 과거 시행하던 형벌처럼 칼로 수없이 토막 나서 죽는 경우가 있고 말 다섯 마리가 사지를 찢어죽이기도 하고 몽둥이에 맞아죽는 사람이 있고 자승자박의 경우도 있고 참수형을 당하기도 하는 등 매우 잔혹한 경우가 있습니다. 수면제를 먹이거나 마취주사를 놓고 총살하는 현대의 형법은 비교적 인도적이라고 할 수 있어서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게 하고 평소 잠을 자는 것처럼 죽기도 합니다.

장작 한 개비가 타면 다시 장작을 넣고 태우는 장작불처럼 사람은 죽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장작이 하나하나 이어서 타는 것은 각기 다른 단계를 거치는 인생과도 같은 것으로 생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탑니다. 마치 우리들 손에 들고 있는 염주를 한 알, 두 알 넘기며 108개의 염주를 세면 한 바퀴 다시 돌아오는 것과도 같습니다. 생명도 역시 이와 같아서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치는 것이 마치 염주의 한 알, 한 알과도 같으며 ‘육도윤회’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지극히 담담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기계’가 낡았으니 새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서 죽기를 바라는 노인이 있기도 합니다. 마치 옷이 낡았으니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집이 낡으면 새로 지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죽음은 마치 옷을 갈아입고 집을 새로 짓는 것과도 같은 것이므로 달리 유난스러워 할 거리가 안 됩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으로 목표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인간 세상에 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 저는 줄곧 다시 돌아와서 출가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심지어 천주교 ‘선국새(單國璽)’ 추기경에게도 “다음 생에도 역시 주교를 하시고 나도 다시 출가승이 되도록 하시자”고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목표가 있었기에 죽음이 달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선국새 추기경은 암 말기에 ‘생명을 작별하는 여행’을 하면서 진정으로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가 죽으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른다는 것 외에 또 다른 관건은 바로 이 신체기관의 기능이 멈추는 것을 죽음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가지고 있는 몸이 움직일 수 있으면 살았다고 하고, 몸이 움직이지 못하거나 숨을 쉴 수 없으면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나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생명은 죽지 않으며 단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존재할 뿐입니다. 마치 물로 말한다면 같은 물이라도 냉장고에 넣으면 얼음물이나 얼음이 되고, 가루를 넣으면 푸딩이나 반죽이 되며, 수증기가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서는 구름층이 되기도 하지만 물의 본질은 전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바깥으로 보이는 형체는 같지 않지만 생명의 본질은 죽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단지 그 인연에 따라서 여러 공간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어찌됐든 죽는 것은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처럼 오늘날의 이민과도 같습니다. 이민을 가려고 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가진 자본이 어떤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가진 자본이 많으면 다른 지역으로 갔더라도 좋은 집을 구매할 수 있고 똑같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자본이 부족하다면 다른 동네로 이민을 가도 어렵게 사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사의 문제에 부딪치기 이전에, 즉 이민가기 전에 먼저 준비를 잘 해야 하고 자신이 가진 것이 충분한지 충분하지 않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가령 죽음에 닥쳤는데 당신에게 목표가 없거나 가진 것이 없다고 한다면, 마치 형법 위반으로 군대에 가서 몸으로 때워야 한다면 어느 곳으로 끌려가고 어떤 상황에 놓일지 전혀 모르는 것과도 같이 당연히 아주 무섭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외에도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무섭게 느끼는 원인은 바로 ‘살아있음’에 대한 연연으로 살아있는 동안의 많은 가족과 많은 익숙한 곳과 알고 있는 많은 사물과 심지어는 갖고 있는 많은 재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으면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고 느끼기에 연연해합니다. 사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본성 속으로 가진 공덕자산은 세간에 남겨놓아야 하는 가산재물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당신이 모두 다 갖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지금 생에서의 모든 관계가 다 없어져버리고 완전히 생소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걱정으로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격음의 미혹(隔陰之迷: 윤회하면서 전생의 대부분 기억을 상실: 역주)이라고 합니다. 몸이 바뀌면 마치 나라와 도시가 바뀌는 것처럼 모든 도로와 상점, 인간관계가 다 달라집니다. 그러나 인생은 이렇듯 이쪽으로 가고 저쪽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슬퍼할 것이 아닌 것이 당신은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관계를 다시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우리들이 육도윤회를 거쳐 왔던 수천만억년을 거슬러서 계산해본다면 세상사람 모든 중생 어느 누구가 우리들의 부모형제자매가 아니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어떤 종족이든, 어느 나라이든, 어느 지역이든 상관없이 다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고 다들 나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연’을 말하고 ‘연기’를 말합니다. 모두가 다 ‘연기법’ 속에서 생존하고 있어서 인연이 모이면 생겨나고 인연을 다하면 흩어지게 됩니다. 이 ‘연기’의 이치가 바로 생사의 관건이고 생사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아주 쉽고 분명한 이치가 있는데 우리들이 인간세상에서 ‘좋은 인연을 두루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연을 많이 맺으면 미래 관계가 좋아지고 인연을 적게 맺으면 사람들과의 앞날에 불편함이 많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종교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지만 당신이 선행을 하였는지 악행을 하였는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는지 맺지 않았는지는 자신의 미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 인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인연이 있어서 우리가 만나게 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지난 관계를 아는 것 같습니다. 혹은 부부가 다음 생에도 다시 부부가 되기를 바라거나 스승과 제자가 다음 생에도 다시 사제관계가 되기를 바라면 ‘다음 생의 인연을 같이 만들어 봅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유럽으로 이민을 가기를 바라고 있어!’ ‘호주로 이민을 갔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어느 경우에는 원력이 인생의 방향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 ‘신(信), 원(願), 행(行)’이라는 말이 있듯이 당신에게 원력(願)이 있는데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그 뒤에 따르는 행위, 행동도 큰 관계가 됩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18호 / 2017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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