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7.12.11 월 11:03
> 연재 | 이제열의 파격의 유마경
43. 이것과 저것청정 아닌 무명과 번뇌 속에서 해탈 얻는다
이제열  |  yooma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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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5  15: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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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이 물었다. ‘마땅히 부처님의 해탈은 어디서 구합니까?’ 유마힐이 대답하였다. ‘일체 중생의 마음에서 구할 것입니다. 또 당신께서 나에게 왜 시자가 없느냐고 물었는데 나의 시자들은 뭇 마군과 외도들입니다.’ 문수보살은 또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중생의 병을 위문하여야 합니까?’ 유마힐은 말하였다. ‘몸이 무상하다고 말하면서도 몸을 싫어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몸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열반을 좋아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몸이 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중생제도 할 것을 말하며 몸의 공을 말하면서도 마침내 단멸하다고 말하지 않으며 죄를 참회라고 말하면서도 과거에 집착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자기의 병으로써 남의 병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의사가 되어 여러 중생의 병을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번뇌와 열반 둘은 같은 성품
불성이 중생의 업 따라 연기
소승에선 몸을 혐오하지만
대승에선 이 또한 분별일 뿐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는 다 같은 법신의 권현들이다. 문수보살이 부처이고 유마가 문수보살인데 무슨 질문과 답변이 있겠는가?

다만 소승의 수행자들과 범부들의 잘못된 지견을 깨뜨리기 위해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해탈은 어디서 구하느냐고 질문한다. 이에 유마는 중생의 마음에서 구하라고 답변한다. 소승의 관점으로 보면 마땅히 부처님의 해탈은 청정한 마음에서 구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대승의 이치를 완전히 꿰뚫은 유마의 관점에서는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해탈원리로 보고 있다. 중생의 마음은 청정하지 못하다. 무명과 갖가지 번뇌에 의해 얼룩져 혼탁하기만 하다.

이런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해탈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소승과 달리 대승은 중생의 무명과 번뇌의 속성을 부처성품 즉 불성으로 파악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마치 물이 아무리 오염되어 탁한 물이 되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친다할지라도 그 물이 지니고 있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성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중생의 마음은 늘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과 같은 청정한 성질을 버린 적이 없다. 더럽기만 한 중생의 마음과 청정하기만 한 부처님의 마음은 서로 대립된 관계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에 있어서는 동일한 성품을 지닌 것이다.

또한 유마거사를 시중하는 시자들은 직심과 순종심을 지닌 보살과 같은 자들이 아니라 마군과 외도들을 시자로 삼는다고 했다. 이 역시 불이의 법문으로 불성과 불성의 작용과의 관계를 설한 내용이라 하겠다. 불성은 청정무구한 부처의 밝은 성질인데 그 불성이 중생에 의해 갖가지 업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의 선행과 악행, 복행과 죄행이 모두 청정한 불성이 중생의 마음 따라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이와 같은 불성의 전도(轉倒)로 나타난 중생의 마음을 완전히 조복 받아 이를 부처님을 시중드는 시자로 삼았다.

이른바 ‘원각경’의 말씀처럼 음노치(?怒癡)와 계정혜가 다 같은 원각의 성품이라 한 것처럼 중생들의 일체의 무명과 번뇌의 성품이 곧 불성인줄을 깨달으면 그 음노치를 비롯한 무명과 번뇌들이 즉시로 원각불성으로 화하여 자신과 중생을 이롭게 하는 시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유마거사는 계속하여 소승의 관점들을 완전히 뒤집고 대승의 시각에서 중생들을 교화할 것을 주문한다.

소승에서는 몸은 무상하고 더럽고 나가 아니므로 이를 싫어하고 떠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소승에서는 몸을 지나치게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짙다. 이에 반해 유마거사는 몸이 비록 무상하고 부정하며 나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몸을 싫어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대승의 지혜에서 관찰한다면 몸은 본래 더러운 존재도 깨끗한 존재도 아니다. 몸이 더러우니 깨끗하니 하는 것은 다만 분별에 지나지 않는다.

몸은 본래 중생의 분별을 떠나 그 자체로 한결같이 법성을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무아에 있어서도 몸이 비록 나가 아니라고 해서 현실의 이 몸을 무시하고 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세상을 향한 선한 행위마저 없어서는 안 된다. 몸은 나가 아니지만 이 몸이 모든 일을 만들고 선악의 과보를 맺게 하니 몸으로써 중생교화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렇듯 유마거사는 이것과 저것을 따로 떼놓고 이것을 구하고 저것을 버리는 행위로는 부처세계에 들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418호 / 2017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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