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묘희세계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버려라!-하
45. 묘희세계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버려라!-하
  • 이진경 교수
  • 승인 2017.12.12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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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 구하는 마음이 평온 교란하는 최대 장애

▲ ‘발우를 들고 성에 들어가 밥을 드시오’ 고윤숙 화가

운문이 백추(白槌)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말했다.

바람과 파도가 없는 바다란 있을 수 없기에
풍파 없길 바라는 마음 끊을 때 평온 가능
고요한 산속 평정, 시장판에서 쉽게 부서져


“묘희세계(妙喜世界)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 버려라! 여러분, 발우를 들고 호남성에 들어가 밥을 드시오.”

묘희세계란 시방정토의 하나로 아촉불(阿?佛) 내지 부동여래가 머무는 세계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 중 하나고, 속세를 떠난 진리의 묘희를 항상 느끼며 사는 세계를 뜻할 것이다. 

묘희세계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 버리라는 이 강렬한 말로 그는 묘희세계를 찾으려는 생각을 단번에 부수어버린다. 그 대신 발우를 들고 호남성에 들어가 밥을 먹으라고 한다. ‘선문염송’에 주를 단 각운(覺雲)은 호남성이 먹고 살만 하니 밥을 얻어먹기 좋아서 그리 말했다고 하지만(‘정선 공안집 2’, 1152), 그런 걸 고려해서 호남성을 언급했을 거 같지는 않다. 즉 호남성을 섬서성, 사천성으로 바꾸어 쓴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어디가 되건 사람들이 먹고 사는 세간에 들어가서 밥을 얻어먹으라는 말이고, 묘희세계를 찾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게 도라는 것이다.

돌아보면 이는 견고한 법신을 찾는 것에 대해 부서지고 무너지는 대천세계를 따라가라고 했던 대룡이나 대수의 말과 다르지 않다 하겠다. 그러나 이 말은 단지 무상한 색신의 세계가 바로 법신의 세계임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묘희(妙喜)’라는 말로 표현된, 평온하고 조화로운 세계를 구하려는 불도(佛徒)의 발상을 부수어 주기 때문이고, 고요하고 안정된 곳을 찾으려는 구도자의 욕망을 깨부수어 주기 때문이다.

묘희세계란 기쁨으로 충만한 세계겠지만, 그 기쁨(喜)조차 기쁜 건지 아닌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지 못할 묘한 경계에 있는 그런 세계일 것이다. 적대도 갈등도 없고, 탐욕도 분노도 없는 깨끗하고 평화로운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들이 사는 세계라면, 그런 세계가 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기 위해 욕망으로 추동되는 것이 사람이고, 그 욕망으로 생존을 지속하려하기에 장애를 만나면 화를 내고 미워하는 게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어찌 탐욕과 미움, 적대와 충돌이 없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우리가 매일 대면하는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을 만날 때마다 갈등하고 부딪치는 이들을 피하고 싶고 이 피곤하고 힘든 세계를 떠나 갈등 없는 세계에서 살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런 마음이 어느새 하늘로 날아오르며 구하는 게 평등하고 평화로우며 탐욕도 분노도 없는 저 묘희세계 아닌가? 적대와 갈등이 사라진 조화로운 세계 아닌가?

그러나 바로 그런 세계를 찾는 마음이야말로 싫은 것을 떨치려는 분노의 마음(嗔心)이고, 그런 세계에 대한 욕망이야말로 좋아하는 것에 달라붙는 탐욕의 마음(貪心) 아닌가? 유토피아란 원래 비참한 현실이 뒤집혀 반영된, 현실의 거울상이다. 조화로운 세계 또한 불화로 가득 찬 세계의 거울상이다. 지배자나 통치자들이 걸핏하면 말하는 ‘합의’가 실은 엄연한 ‘불화’를 가리는 교언(巧言)에 불과하듯이, 조화롭고 평화로운 합일된 세계는 적대하고 상충하는 분열된 세계를 가리는 안이한 영색(令色)이다. 이런 말들, 이런 꿈들을 따라다닐 때, 현실의 불화는 더욱더 해결의 길로부터 멀어지고, 현존하는 적대는 더욱더 극심해진다. 반대로 그 불화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불화를 야기하는 힘들을 냉정하게 추적하여 그것이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방법을 찾는 세심한 시선이야말로 그 불화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평온하게 살아갈 길을 연다.

선가에는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는 것을 우려하는 말들이 자주 보이지만, 사실 바람 없는 대기가 어디 있을 것이고 파도 없는 바다가 어디 있을 것인가? 평온하고 고요한 삶이란 그게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끊을 때 가능한 것이다. 고요함과 평온함을 구하는 마음이야말로 평온한 삶을 교란시키는 최대의 장애다.

꽤 오래 전에 일본의 영화감독 한 분과 얘기를 하면서, 나는 걸핏하면 사고 나고 걸핏하면 문제가 터져 나와, 조용히 공부나 하면 좋겠다 하는 사람도 시도 때도 없이 시위에 나가게 하는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욕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분은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능하신’ 관리들 덕에 표면상으로는 별 문제 없어 보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그래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도 없고 변화를 위한 운동도 없는 당시 일본에 대해 ‘바카나 헤이와’, 즉 ‘바보 같은 평화’라는 말로 ‘응수’했다. 평화로울 때가 없고 걸핏하면 싸우고 뒤집고 해야 하는 나라와 평화롭지만 어떤 것도 변할 것 같지 않은 나라, 어디가 더 좋을까? 일단 세상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끄러운 나라는 시끄러워서 싫고/좋고, 평화로운 나라는 평화로워서 싫고/좋고. 하지만 그 감독은 바보 같은 평화에 대한 반감이 아주 확고했다. 생각해보면, 아무 일 없이 매일 매일이 그게 그거인 평화로운 천국의 삶이 지금 사는 나라보다 더 행복할까 싶다. ‘할 일 없는’ 경지에 가보지 못한 처지이기에 하는 바보 같은 말이겠지만, 그런 천국은 정말 심심할 거 같다.

따로 조화로운 세계를 찾지 말고 따로 고요한 곳을 찾지 말라는 말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아니고, 또 많이들 알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많이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깊이를 가진 이들도 어느새 잊고 마는 말이기도 한 것 같다. 가령 하이데거는 근대 과학기술의 지배를 쉽게 넘어설 수 없으며 ‘고향상실’-조화로운 공동체의 와해?을 극복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느새 사방(四方)이 합일된 세계를 반복하여 설파하고 있으며, 그런 세계를 위해 시를 쓰는 것을 지고한 존재론적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고요한 곳을 찾지 말고 시장 속으로, 밥을 벌어먹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선사들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음에도 고요한 곳을 찾아 산 속으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긍지로 삼는 선객들 또한 적지 않다. 물론 찢겨지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평정을 유지하며 살기는 결코 쉽지 않으며, 시장판에서 오래 산다고 번뇌의 세계 속에서 고요하게 사는 능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돈과 경쟁, 적대와 충돌을 따라다니며 더 그것들에 끌려 다니기 십상이다. 아마도 그래서 선방에 앉아 행을 닦는 것이 필요한 것일 게다. 그러나 선정을 닦는 것이 고요한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이 시끄러운 시장판에서, 어느새 적대로 치달리곤 하는 이 세계 속에서 묘희세계와 함께 쉽게 부서지고 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한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무엇이 정(定)입니까?”
“정(定)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하지 않다 하십니까?”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조주록’, 58~59)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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