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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커피나 홍차만으로 충분한 카페인

기자명 조정육

누군가와 비교할때 ‘카페인 우울증’에 빠진다

▲ 박순철, ‘그냥 웃지요’, 66×96cm, 한지에 수묵, 2017.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주눅 들 필요 없다.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법을 따라 내 기도를 버릴 필요도 없다. 지금 하는 그대로도 충분하다. 부족하지만 현재 이대로의 자신을 밀고 나가면 된다. 다만 늦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오늘 아들이 오는데 이불은 개야 하지 않을까?”
“이불 안 갠다고 누가 뭐라 그래? 나 편한대로 살면 되지.”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오면 앉을 자리는 있어야지.”
“그것도 그렇네. 그럼 오랜만에 청소나 한번 해볼까?”

“당연하지. 이렇게 어질러 놓으면 아들이 또 오려고 하겠어? 집도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맛있는 음식도 해놔야 자주 오려고 할 거 아니야? 바쁜 아들이 재미없는 부모를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잖아. 경건한 마음으로 아들 맞을 채비를 해야 도리지. 그나저나 당신 참 많이 변했다. 나야 원래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당신은 진짜 깔끔하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버렸어?”
“뭐가 어때서? 집에서까지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살 필요 없잖아.”

생소한 신조어 ‘카페인 우울증’
카페인 부족한것 말하는게 아니라
SNS 때문에 생긴 새로운 우울증
환상적인 다른 사람의 일상 보며
내 모습 지지리도 궁상맞게 보여
타인의 행복 뒷면에도 슬픔 존재
나만의 행복있기에 비교할것 없어

토요일 아침이었다. 대전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아들이 오기로 한 날이었다. 아들을 핑계로 우리는 오랜만에 집안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보통은 일주일에 한번 씩 이부자리를 정리하는데 이번 주는 아들 덕분에 사흘이 단축되었다. 집안이 반짝반짝 광택이 날 것 같다. 

평소에 우리 부부가 사는 집을 들여다보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편안하다. 말이 좋아 편안이지 정리정돈이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 정확하다. 우리가 편안하게 사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은 소파에 쿠션 올리기다. 우리는 쿠션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 힘들게 허리를 굽혀 줍지 않는다. 발로 차서 소파에 골인시킨다. 내가 발로 찰 때 남편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두 사람의 포지션은 순식간에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선수로 뒤바뀐다. 내가 날렵한 동작으로 발을 움직여 잽싸게 골을 차 넣는 동작을 취하면 남편은 두 팔을 넓게 뻗어 언제 날아들지 모를 공을 막아내려는 자세를 취한다. 쿠션을 소파위로 적중시키려는 나와 날아드는 쿠션을 막으려는 남편의 모습은 흡사 박지성과 마누엘 노이어처럼 진지하다. 내가 슈팅한 쿠션은 골키퍼의 철벽수비에 막혀 번번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선수는 몇 번이고 쿠션을 발로 차서 기어이 소파 위로 골인시킨다. 그 순간 골키퍼는 박수를 치면서 상대의 골인을 축하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마주보며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다보면 운동도 되고 스트레스도 풀린다. 대신 마루는 격렬한 몸싸움에서 발생한 먼지 때문에 사방이 난장판이다. 꼭 어린애들이 사는 집 같다. 그나마 우리가 어른이라 야단칠 어른이 없어서 다행이다. 만약 어른이 있었다면 당장 쫓겨났을 것이다.

남편은 박사, 나는 작가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집 공기가 숨쉬기조차 힘들만큼 무겁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집 공기는 발로 찬 쿠션 때문에 풀풀 날아다니는 먼지처럼 가볍다. 집은 모델하우스가 아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긴장하면서 지내야 할 공간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쉬는 장소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좋고 어떤 행동을 해도 괜찮은 곳. 그곳이 바로 집이다.

카페인 우울증이란 신조어가 있다. 카페인이 부족해 생긴 우울증이 아니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 때문에 생긴 우울증이다. 카페인을 접속하면 남루하기 그지없는 나의 일상과 영화처럼 아름다운 다른 사람의 일상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림처럼 환상적인 풍경 앞에서 환하게 웃는 그.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는 그녀. 카페인 속의 사진과 사연은 영화처럼 화사한데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낡은 추리닝바지처럼 후줄근하다. 카페인에서 눈을 돌려 내 주변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나온다. 뭐야 이 추레함은. 윤기 나는 사람들 곁에 나만 생뚱맞게 잘못 놓여진 것 같은 낯설음이 다가온다. 우아한 몸매의 영화배우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걸어가는 공간에 잠에서 깬 모습 그대로의 내가 부스스한 얼굴로 들이닥친 것 같다. 상대적으로 나의 일상이 더 낡아 보인다. 나는 아무리 치워도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지지리도 궁상맞게 살고 있는데 그들은 궁전 같은 세상에서 날렵하게 행복을 누리는 것 같다. 내가 구절양장 늘어지는 산문처럼 살 때 그들은 시처럼 간결하고 은유적으로 사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말 카페인 속의 세상이 전부일까. 단언컨대 카페인에 보이는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은 그들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 사람이 찍은 행복의 프레임 밖에는 또 다른 추레함과 슬픔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며 나만 불행하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우울증은 정말 쓸모없는 감정 낭비다. 카페인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다면 카페인 섭취를 멈추는 게 낫다. 카페인은 그저 커피와 홍차를 마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깊이 들여다보면 내가 사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설령 차이가 난다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삶. 만족하며 사는 나의 삶이야말로 수십 편의 영화보다 더 소중하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우울증과 절망감은 단지 카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행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신행수기나 수행에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카페인과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절망감을 느낄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한지 며칠 만에 소원을 이루었다는 영험록에서부터 꿈속에 관세음보살을 보았는데 병이 나았다는 몽중가피까지 들리니 기도성취요 기도가피의 얘기뿐이다. 어떤 사람은 몇 달 동안 목숨을 걸고 용맹정진한 끝에 확철대오했다는 이야기도 수없이 들린다.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는데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빨리 가피를 입을 수 있었을까. 나는 아무리 각오를 단단히 해도 며칠 못 가서 무너지는데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의지가 강할까. 부럽다 못해 내 자신이 한심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굳이 다른 사람의 속성가피나 확철대오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단지 나는 내가 하던 기도와 공부를 계속해나가면 된다. 어떤 기도나 공부법이 더 효과가 있고 영험하다는 말에도 신경 쓸 필요 없다. 그저 진심을 다해 내가 선택한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 때가 무르익을 때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아무리 큰 가피를 입어도 생사해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제한적인 가피일 수밖에 없다. 기도의 가피보다 끊임없는 정진이 더 중요한 이유다.

남편과 나는 집에서 쿠션만 발로 차면서 살지는 않는다.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고 참선도 한다. 부처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삶에 낡은 집이나 허름한 소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남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꿀릴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본질을 잊지 않고 살면 된다. 카페인은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이대로도 나는 충분히 잘 하고 있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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