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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진표 스님의 점찰법회

기자명 주수완

궤 뽑아 업보 알아보는 점찰, 정법일까 미신일까

▲ 진표 스님이 출가하고 주석했던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진표 스님 신앙의 기초가 미륵신앙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전각이다.

‘삼국유사’를 통해 가장 널리 알려진 고승은 아무래도 자장, 의상, 원효스님이 아닐까? 그런데 의외로 이분들 못지않게 일연 스님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 고승이 있으니 바로 진표 스님이다. 특히 진표 스님은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라고 이어진 두 글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 분량을 합치면 상당한 비중인 셈이다. 그럼에도 진표 스님이 앞서의 다른 스님들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분의 점찰법회라는 것이 맥을 잇지 못하고 오래전에 끊긴 탓이 아닌가 한다.

진표 스님, 치열한 망신참법
지장과 미륵에게 계를 받아

점 치는 ‘점찰경’과 189개 궤
업보 알아보고 수행법 선택

수나라선 ‘점찰경’ 위경 논란
일연스님 “오해서 비롯” 비판

인도에 없는 궤 뽑는 방식은
주역점 불교에 적용 가능성

공자, 주역점 비판 세력에게
“점 통해 덕과 의 살펴” 설명

금산사, 점찰법회 복원 재연
방등계단, 사리 가능성 높아

먼저 실린 ‘진표전간(진표 스님이 간자를 전하다)’은 일연 스님이 직접 정리한 이야기로 보이고 ‘관동풍악발연수석기(금강산 발연사 석비의 기록)’는 진표 스님이 말년에 주석하다 입적한 발연사에 1199년에 세워진 석비의 내용을 채록한 것이다. 이에 의거해 보면 진표 스님은 12세에 금산사의 숭제 법사 문하에서 출가하였는데 법사가 말씀하시기를 본인은 당나라로 유학 가서 삼장법사 선도 스님께 배우기는 했지만 계는 오대산의 문수보살로부터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진표 스님도 스스로 정진하여 보살로부터 직접 계를 받으라고 조언했다. 이렇게 계를 받는 방법을 자서수계(自誓授戒)라고 한다. 물론 내용상으로는 보살로부터 계를 받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계를 받는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숭제법사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제자 한분을 잘 둔 덕분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여하간 진표 스님이 “그렇게 보살로부터 계를 받으려면 수행을 얼마나 해야합니까?”라고 묻자 “열심히만 하면 1년이면 된다”고 하셨으니 본인이 밟았던 그야말로 속성코스를 제안하신 셈이다.

▲ 김홍도가 그린 ‘금강산 발연’. 진표 스님이 말년에 주석했던 발연사는 이 ‘발연’ 근처에 있었다.

이 조언을 듣고 진표 스님은 ‘망신참법’을 써서 보살로부터 계를 받기를 구했는데, 망신참법이란 온몸을 혹사시켜 죄를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불자들도 108배를 하며 참회를 하고는 하는데, 그것이 몸을 혹사시킬 정도는 아니지만, 여하간 그처럼 스스로 몸을 힘들게 하여 참회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개념이다. 다만 진표 스님은 절하는 수고 정도가 아니라 선계산(仙溪山) 부사의암(不思議菴)에 들어가 온몸을 바위에 부딪치는 극단의 고행으로 참회를 하셨다는 점에서 108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팔뚝과 무릎이 부러지고 피가 바위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 부사의방은 현재 변산반도의 의상봉 아래 문수계곡이라는 곳에 있는 천연 돌방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진표 스님은 욕심이 많았던지 숭제 법사는 1년 속성코스를 제안했을 뿐인데 본인은 더 빨리 계를 받겠다는 생각에 7일을 기한으로 잡았다. 그런데 실패하자 1주일을 더 그렇게 망신참법을 행했다. 그러자 드디어 14일째 되던 740년 3월15일 진시, 즉 아침 8시를 전후한 때에 지장보살이 감응하여 나타나 진표 스님에게 계를 주셨다. 이때 스님의 나의 23세였다. 그런데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진표 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반드시 미륵보살에게 수계를 받고 싶어 영산사(靈山寺)라는 곳으로 옮겨가 다시 망신참법을 시작했다.

▲ 금산사 미륵전 안에 봉안된 미륵삼존상. 근대조각가 김복진의 작품이지만 이전부터 대형미륵존상이 봉안되어 있던 전각이다.

이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도 있다. 이미 지장보살이 계를 내려주시기까지 했는데 자신의 목표는 미륵이라며 다시 수계를 받는 것은 자칫 지장보살에게는 결례가 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지장이 주신 계는 석사급이고, 미륵이 주셔야만 박사급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는 숭제 법사가 처음부터 지장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를 받으라고 권하는 장면이 나오고, 실제 두 보살이 함께 나타나 계를 주는 장면도 나온다. 아마도 지장보살의 수계가 미륵의 수계보다 급이 낮아서가 아니라 여하간 진표 스님은 그 사상적 배경에 있어 지장신앙과 미륵신앙을 아우를 어떤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발연수석기’에 의하면 진표 스님은 3년간 수행했지만 감응이 없어 부사의방에서 몸을 던져 죽으려 했는데 청의동자가 내려와 몸을 받아 구해주었고, 여기서 다시 발심하여 21일을 기한으로 망신참법을 행하여 7일째에 지장보살을 만나고, 21일째에 지장과 미륵보살을 만나 계를 받았다고 한다. ‘진표전간’에는 미륵보살로부터 계를 받은 날짜는 안 나오지만, ‘발연수석기’를 보면 아마도 740년 3월15일에 지장과 미륵으로부터 동시에 계를 받은 것이 아닐까. 여하간 결국 미륵보살님까지 동원되어 계를 주시고는, 더하여 ‘점찰경’ 두 권과 간자 189개를 전해주었다.

▲ 진표 스님의 지시로 제자 영심이 속리산에 세운 법주사. 금산사에 미륵전이 있다면 법주사에는 팔상전이 있다.

이때 받은 ‘점찰경’은 본래 명칭이 ‘점찰선악업보경’인데 자신의 선악의 업보를 점을 쳐서 알아보고 그에 맞춰 최적화된 수행에 집중할 것을 설한 경전으로서 지장보살이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처음에 지장보살이 나타나 계를 주신 것은 이 ‘점찰경’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189개의 간자는 ‘점찰경’에 의한 점을 칠 때 필요한 나무로 된 막대기이다. 이 나무막대기를 던지거나 뽑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미륵보살은 간자를 진표 율사에게 전하며 “8번, 9번 간자는 내 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를 통해 보면 ‘점찰경’은 지장보살, 간자는 미륵보살이 주신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이 ‘점찰경’에 의한 의식을 행하는 것을 ‘점찰법회’라고 한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동국대 총장이신 보광 스님의 ‘지장사상에 관한 연구’에서도 상세히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진표전간’을 통해 사실상 이 점찰법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싶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읽어보면 수나라 때 어떤 스님이 ‘선’과 ‘악’이 쓰여진 가죽쪼가리를 던져서 선악의 업보를 점치고 스스로 벌을 주어 죄를 멸하는 소위 ‘박참법(撲懺法)’이란 의식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러한 의식이 ‘점찰경’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를 조사한 결과 ‘점찰경’은 위경이라 판단하고 혹세무민하는 이 의식을 금지시켰다. 일연은 이에 대해 ‘점찰경’에 의한 점찰법회는 그렇게 선·악 두 글자로 간단히 행하는 의식이 아닌데 그것을 어설프게 흉내만 낸 의식을 금지시켜 버리면서 ‘점찰경’ 자체가 오해를 받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 금산사 방등계단. 혹시 미륵보살의 손가락뼈로 만들었다는 두 개의 간자를 봉안한 진신사리탑이 아닐까?

말 그대로 ‘점’을 치는 경전이니 미신이고 혹세무민이라 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것은 밀교적 성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진표 스님이 행한 점찰이니 간자니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주역(周易)에 의거해 점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주역에 의한 점을 칠 때도 산가지, 산책이라 부르는 나무막대기를 이용하여 괘를 뽑는데, 아마 간자가 그러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유학자들도 즐겨 ‘척자점(擲字占)’이라는 점을 봤는데 이는 마치 윷놀이와 비슷하게 점괘를 뽑는 방식이다. 이것이 간자를 사용하는 방법과 닮았다. 사실 수나라 때 ‘점찰경’의 인도 판본이 없다는 이유로 위경이라 판단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점찰경’의 점치는 방법은 인도에는 없는 매우 동아시아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점찰경’은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해왔던 주역에 의거해 괘를 뽑아 점을 치는 방법을 불교에 적용한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겠다. 주역에서의 64괘에 대응하여 불교에서는 미륵이 진표 스님께 전한 189개의 괘를 설정한 셈이다.

공자도 즐겨 주역에 의해 점을 쳤으니 ‘점찰경’ 자체를 두고 미신이니 혹세무민이니 할 것은 못된다. 점을 치는 공자를 제자들이 비난하자 공자는 “사람들이 내가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점을 본다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다르다. 나는 주역을 통해 ‘덕(德)’과 ‘의(義)’를 살필 뿐이다”라고 했다. ‘점찰경’을 죄를 알아봐주고 돈을 내면 부적을 써서 죄를 없애주겠다는 식으로 장사에 사용했다면 그야말로 미신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범법행위인 살인, 강도가 아니더라도 불효, 질투, 집착 같은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의 잘못을 상기시키거나 혹은 “그래 힘들었지만 참 잘하고 있어”라고 칭찬과 격려를 해준다면 공자가 말씀하신대로 ‘덕’과 ‘의’를 함양하는데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다.

근래는 스마트폰 앱으로 과거 전생도 알아 맞춰보고, 성격 테스트도 하고, 지능 테스트에도 도전해본다. 그것이 혹세무민일까? 말하자면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저 재미로 한다. 그리고 자신과 부합되는 부분이 나오면 “용하다” 하고, 아니면 그만이다(뒤끝도 있기는 하다). ‘점찰경’은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스님과 불자가 모여 마치 앱으로 전생을 알아보고 게임을 하듯이 즐겨 어울리며 서로 칭찬하고 서로 조심하자는 대중적 불교운동의 하나였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점쟁이가 될 수도 있고 공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좋을 수도 있는 전통이 끊긴 것을 일연 스님은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금산사에는 방등계단이 있는데, 형태는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닮았다. 이런 금강계단형식의 탑은 원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인데 왜 금산사에 이러한 계단이 있는지 유래가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만약 진정 이 안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면 그것은 혹시 진표 스님이 미륵으로부터 받았다는 제8, 9번째 간자가 아닐까? 그것이 미륵보살의 손가락뼈라고 했으니 그야말로 미륵보살의 ‘불지사리’인 셈이다. 어찌 진신사리급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런 금산사에서 점찰법회를 복원하여 재현하기도 했다 하니 일연 스님께서 한시름 놓으셨을 듯하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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