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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마음을 목석과 같이 하여라

기자명 정운 스님

마음의 생멸 따라 법도 생기고 소멸

원문: 배휴가 물었다. “혹 시방제불이 출세(出世)한다면 무슨 법을 설하겠습니까?” 선사가 답했다. “시방의 제불이 출세하더라도 모두 한 가지로 일심법을 설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밀밀히 부촉하셨기 때문에 이 일심법의 본체가 온 우주 허공 법계에 두루하다. 이를 제불의 이치라고 한다. 어찌하여 이 법을 언구상에서 체득하려고 하는가! 이 뜻은 한 경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묵묵히 계합해서 얻는 것이다.…혹 취하고 버리는 분별심이 없다면, 마음이 목석과 같아진다. 바로 그때서야 비로소 도를 배울 수 있는 분이 있다.” 배휴가 물었다. “지금도 갖가지 망념이 있는데, 왜 없다고 하십니까?” 선사가 답했다. “망념은 본래 근본이 없는 것이요, 이 마음이 일으킨 것이다. 그대가 만약 마음이 바로 부처[心是佛]임을 깨닫는다면 마음은 본래 망념이 없거늘 어찌 다시 마음에 망념을 일으키는가?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소멸된다’고 하였다.” 

부처는 “5근 주인은 마음” 강조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
다스려야 해탈세계로 들어가
대승은 “마음이 장벽 같아야”

해설: ‘언구상에서 (마음을) 체득하려고 하는가?’에서 황벽은 밀밀이 이심전심으로 스승에서 제자로 전법되는 것이지, 언어로는 얻을 수 없는 이치임을 강조한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성불하신 뒤 적멸의 세계에 들고자 했다. 범천의 권청으로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셨다. 곧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은 연기설이지만, 수행하는 방법론으로 4성제를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는 연기이지만, 4성제를 말씀하셨듯이 깨달음은 어떤 형체도 색깔도 무게도 없고 장소도 없지만, 이를 언설이라는 수단을 빌려서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선사들도 깨달음을 표출하기 위해 언어·문자·불자·주장자·방·할 등을 활용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조사들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 어록이요, 여기서 공안을 발췌해 송고문학이 발전되었고, 여기서 간화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곧 부처님을 비롯해 역대 조사들이 깨달음을 얻은 뒤 혼자 적멸의 경지에 머물러 침묵하셨다면, 지금과 같은 선이 없을 것이요, 인류에 광명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원문에서 ‘마음이 목석과 같아야 그때서야 비로소 도를 배울 분이 된다’는 말은 마음이 견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이렇게 강조하셨다. “마치 목동이 막대기를 쥐고 소를 단속해 소들이 남의 곡식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5근이 원하는 대로, 혹은 욕망대로 자기를 방치해 게을러서는 안 된다. 5근으로 인한 재앙은 적지 않으니, 도둑을 지키듯이 잘 다스려야 한다. 5근의 주인은 바로 마음이다. 5욕에 빠지지 않도록 5근을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인간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다스려야 해탈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대승불교는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달마는 제자 혜가가 “스님, 어떻게 공부해야 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이 없으며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만 도에 들어가느니라”고 답했다. 마음 다스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리저리 날뛰는 마음을 소[牛]와 말[馬]에 비유를 들었다. 수행길이 녹록치 않다. 그러니 부처님과 조사들이 얼마나 위대한 분들인가?

또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깨달았다면, 망념이 본래 없거늘 어찌 다시 마음에 망념을 일으키는가?”를 보자. 지금 황벽은 배휴에게 즉심시불을 깨달았다면, 그 청정심에 왜 또 생각을 일으키느냐고 말하고 있다. ‘종경록’에서는 “지금 그대가 보고 들으며 느끼고 아는 것이 모두 본 자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로 그 본 자성을 여의고 따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본유(本有)이고 금유(今有)이며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 청정하므로 굳이 닦을 필요가 없다. 곧 그대의 본 자성은 본래부터 부처이므로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했다.

마조는 견문각지하는 작용조차도 본 자성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부처의 행이요, 부처의 마음이다. 그래서 굳이 수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의 각오(覺悟)는 있다거나 없다는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느 때나 어느 사람에게나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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