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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부사의 신통

기자명 이제열

실체가 없는 공한 성품이 불법이다

“그때에 사리불이 이 방안에 평상이 없음을 보고 여러 보살과 많은 제자들이 어디에 앉을 것인가를 염려하였다. 유마힐이 그 생각을 알고 ‘사리불님 법을 구하는 이는 몸과 마음도 아끼지 않거늘 평상을 구해서야 되겠습니까? 법은 적멸하고 오염되지 않으며 행함이 없고 상이 없으며 머무름이 없습니다. 법은 보고 듣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신통력으로 삼만이천의 큰 사자좌를 들여 놓았는데 유마힐의 방도 크고 넓어 비좁지 아니하였다. 이런 모습을 본 사리불은 곧 ‘거사님 참으로 회유합니다. 어찌 이렇게 큰 평상들을 방안에 들여 놓았는데도 이 방안은 비좁지 않습니까?’ 유마힐이 대답하였다. ‘사리불님 부처님과 보살들의 부사의 해탈도 이와 같습니다. 이 해탈에 머무른 보살들은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어도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으며 사방의 바다 물을 털구멍에 넣어도 자라, 거북, 물고기 등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리불님,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르는 보살은 옹기장이가 흙을 주무르듯 삼천 대천세계를 자유 자재하게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며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 수많은 몸을 나타내어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른 보살의 지혜방편의 문인 것입니다.’”

소승 아닌 대승 관점서 보면
부처도 열반도 존재치 않아
소승을 대표하는 아라한들
대승선 미완의 수행자 불과

부사의란 중생의 생각이나 분별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유마거사는 사리불 존자를 상대로 부사의한 신통을 보이고 보살의 능력과 교화방편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한다. 이미 밝힌바와 같이 사리불 존자는 소승법을 대표하는 부처님의 제자이다. 그는 아라한으로 모든 번뇌를 여읜 성자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나 대승의 교리에서는 사리불과 같은 소승의 아라한들이 미완성의 수행자로 그려진다. 비록 선정과 지혜를 완성하여 해탈에 들었다고 하나 아직도 법을 관찰하는 안목은 투철하지 않다. 모든 존재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신통이 자재하지 못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사리불은 유마거사의 방에 들어와 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평상을 찾았다. 하지만 유마거사의 방은 유마거사의 평상 외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다른 평상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여기서 우리는 평상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평상은 단순한 평상이 아니라 수행자가 깨달아 안주하는 열반이나 해탈의 경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한다.

소승으로 대표되는 사리불은 깨달음이나 해탈이나 열반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수행자이다. 그는 불법을 실체화시키고 중생의 세간을 떠나 별개로 불법의 세계가 있다고 여기며 그 곳에 깊이 안주한다. 바로 사리불은 유마거사의 방안에 들어와 자신이 머물러야 할 불법의 세계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유마거사는 이러한 사리불의 태도를 대승의 지혜로 꾸짖고 진정한 불법이 무엇인지를 설한다.

불법이란 무인가? 곧 실체가 없는 공한 성품이 불법이다. 중생세간의 실체가 없는 공으로 성품을 삼는다. 그러므로 불법과 중생세간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중생세간의 실체가 없는 공한 성품이 곧 불법이기 때문에 불법 또한 실체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불법이 중생에게는 보이지 않을까? 스스로 분별과 집착으로 자신들의 세간을 실체화하기 때문이다. 중생들이 세간의 실체 없는 공성을 망각하고 집착하므로 세간은 시끄럽고 요동치는 고뇌의 모습으로 뒤바뀌게 된 것이다. 진실로는 모두 공하여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며 생도 없고 멸도 없건만 중생들은 갖가지로 집착하여 모든 것을 실체화시킨다. 여기에는 행위자도 있지 않으며 행위도 있지 않으며 행위에 따르는 과보도 있지 않다. 그러니 어찌 불법이라고 할 만한 곳에 안주하고 열반에 들 수 있겠는가?

실로 대승의 법에는 열반에 들은 자도 열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어서 유마거사의 사자좌, 수미산, 겨자씨, 바닷물 등의 신통은 모두 대승의 깨달음에서 본 세간의 실상을 신비한 설화형식으로 설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고차원의 비유와 상징으로 깨달음에서 본 세간의 참모습을 그렸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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