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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를 기억하다

순교자 있었기에 불교 존속
망각하는 순간 법난 되풀이
순교자 추모일 꼭 제정해야

망각은 때때로 축복이다. 끔찍한 사건과 사고, 속수무책의 자연재해에 노출돼 살아가야 하는 세상. 아프고 두려운 기억이 계속된다면 그 자체로 지옥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기억들은 세월과 더불어 흐릿해지고, 그래서 시간이 약이 되고는 한다. 그렇더라도 잊혀져서는 안 될 일들도 많다. 기억해야할 것을 망각하는 순간 비극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불교계로서는 순교자가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지난 1700년 동안 온갖 부침을 거듭하며 한국인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불교가 숭상되는 시대에는 위대한 사상가가 돋보이지만, 불교가 탄압받는 암울한 시대에는 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빛을 발한다. 한국불교에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고, 그들에 힘입어 한국불교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이 땅에 처음 불교인의 피가 흩뿌려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왕의 주도로 불교를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신라는 100년이 훨씬 더 지났음에도 여전히 불법의 사각지대였다. 이때 신라사의 판도를 바꿔놓은 이는 22살의 청년 이차돈이었다. 527년 8월5일 신심 깊은 이차돈은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고, 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피는 찬란한 신라불교의 서막을 열었다.

불교사에 순교자가 다시 등장한 것은 억불의 조선시대를 맞으면서부터다. 1446년 제주로 유배가 순교한 흥천사 주지 행호 스님이 본격적인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유생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스님이 있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으로 내몰았다. 월심, 계엄, 지성, 상명, 의철, 학선, 죽변, 해초, 각돈, 학전, 설준 등 수많은 스님들이 불법을 펴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거나 참수됐다. 이 중 해초 스님은 교종판사를 거쳐 판교종도대사(判敎宗都大師)를 지낸 고승이며, 각돈 스님은 진관사를 중창하고 1470개의 화엄경판을 완성한 학승이다. 또 설잠 김시습의 스승이었던 설준 스님은 유생들의 표적이 되어 변방으로 끌려가 참사를 당했다.

허응보우 스님도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밝히려 했던 순교자다. 죽음으로 내몰릴 걸 뻔히 알면서 문정왕후의 뜻을 받아들인 스님은 불교중흥에 온힘을 기울였다. 보현사 회암사 등 퇴락한 사찰을 중창했으며, 선종과 교종의 승과를 다시 설치해 유능하고 합법적인 승려 인재 양성에 힘썼다. 서산휴정 스님과 사명유정 스님도 이러한 승과를 통해 배출됐다.

유생들의 온갖 모함과 상소에도 불교중흥에 헌신했던 보우 스님은 1565년 4월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6월 제주도로 귀향을 가야 했고, 같은 해 10월 경 제주목사 변협이 힘 센 무사 40여명에게 매일 스님을 때리도록 함으로써 그곳에서 장살로 순교했다. 순교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후기 선과 화엄의 대가였던 환성지안 스님도 법을 지키다 제주로 유배돼 입적했다.

▲ 이재형 국장
한국불교가 억불의 시기를 거치며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불교인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계는 이제라도 순교자 추모일을 제정해 극한의 상황에서 온몸을 던졌던 불교인들을 선양하고 순교성지도 서둘러 지정해야 한다. 이런 노력들이 선행될 때 전법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될 뿐 아니라 불자들의 정체성과 종교적 자부심 고취로도 이어질 수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언제라도 되풀이된다. 순교의 정신만이 법난의 시대에 불법을 지켜낼 수 있다. 법난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이재형 mitra@beopbo.com

 


[1421호 / 2017년 1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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