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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유마의 침묵 [끝]

기자명 이제열

모든 존재는 성품 없음으로 성품 삼는다

“이렇게 여러 보살들이 제각기 말하고 나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법입니까?’ 문수가 답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일체 법에 대해 말 할 것도 없고 말 하지도 않고 보거나 알 것도 없고 모든 법문조차 떠나는 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거룩한 이여 우리들이 이제 제각기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으니 어떤 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인지 말씀하소서.’ 이때에 유마힐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잠잠히 있었다. 그러자 문수사리가 이 모습을 보고 크게 찬탄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글자도 떠나고 언어도 떠난 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이의 법문을 설하자 오천의 보살들이 불이의 법문에 들어가 무생법인을 얻었다.”

불이법문, 연기·공 입각해
제법의 실상 밝히는 법문
세상 분별 말라는 말 아닌
본질 공함 알라는 가르침

불이법문은 연기와 공사상에 입각하여 제법의 실상을 밝히는 법문이다. 연기는 다른 것들에 의지해서 생기고 일어난다는 의미이며 공은 이러한 연기의 존재들에게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연기는 곧 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공한 속성을 지닌 모든 존재들에게는 자체 모습을 지니고 있거나 자체 성품을 지닐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모습이 없음으로 모습을 삼고 성품이 없음으로 성품을 삼는다.

모름지기 대승의 법문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지금 설명하고 있는 무자상 무자성의 교리를 잘 이해해야 한다. 만약 일체 만법의 무자상과 무자성의 도리를 간파하지 못한다면 대승의 교리들을 납득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는 불이법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이법은 이것이 없다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설에 기반한다. 육근은 육경으로 인해 존재하고 육경은 육근으로 인해 존재하며 부처는 중생으로 인해 존재하고 중생은 부처로 인해 존재한다. 번뇌와 보리 속박과 해탈 극락과 지옥 생사와 열반은 물론이고 자타, 생사, 선악, 미추, 시비, 고저, 등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서 건립되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에게 높고 낮음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일체법의 본성이 공으로써 동일한 성질을 삼는다면 일체 법은 다 평등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일체법의 모습과 성품이 공하여 제 모습 제 성품이 없는 것이라면 그 일체 법들에게는 이름이 붙을 수 없고 개념 가치 기준 따위가 붙을 수 없다. 모습이 실체가 없고 성품이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정해진 이름이 있고 정해진 개념 가치 기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체 법에 대해 정해진 모습과 성품과 이름과 개념과 가치와 기준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견해와 분별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일체 법은 일체 법을 대하는 중생들의 견해와 분별에 의지해서 나타난 것이지 일체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령 연꽃이 눈앞에 있다면 연꽃은 씨앗과 진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 등을 조건으로 생긴 연기이며 공성의 모습이다. 연꽃에게는 연꽃이라고 할 만한 자체모습과 자체성품을 지니지 않는다. 아울러 연꽃에게는 연꽃이라는 이름과 개념과 가치와 기준 또한 정해져 있지 않다. 모두가 연꽃을 대하는 중생의 견해와 분별이 지어 낸 것이다. 연꽃은 일체의 중생의 상대적 분별과 견해를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며 여기에는 어떠한 언어도 용납하지 않는다. 연꽃은 생각과 말길이 끊어진 존재이며 보고 듣고 아는 중생의 경험으로는 파악 할 수 없는 불가사의적 존재이다. 이처럼 연기의 공성인 일체 법은 중생의 견해와 분별과 언어로는 설명 할 수 없으므로 유마거사는 침묵으로써 존재의 실상을 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는 침묵을 요구하는 가르침이다.

이는 세상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라하거나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 대해 분별하고 견해를 내세우고 신념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모두 실이 없는 공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견해와 분별에 가려 제법의 실상을 오해하고 스스로 속박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안팎의 모든 존재가 자신의 마음이 만든 그림자라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것이 유마의 일묵(一黙)속에 들어 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421호 / 2017년 1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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