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3. 전설과 역사의 변증법 [끝]

기자명 주수완

역사와 전설을 아울러 민족적 자긍심 고취시킨 ‘삼국유사’

▲ ‘삼국유사’ 정덕본의 첫 페이지인 ‘왕력’ 도입부.

다시 이야기를 ‘삼국유사’의 맨 앞으로 돌려보려고 한다. ‘삼국유사’의 처음은 ‘왕력(王歷)’으로 시작한다. 곧 ‘연표’다. 그 틀을 보면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순으로 정리되어 있고, 맨 위에는 중국의 연표를 두었다.

전설은 은유로 표현된 역사
옛 전설들 모아 신화 만들어

‘삼국유사’ 많은 학자들 연구
국사 연구에 있어 절대원전

‘술이부작’ 논어 경전됐듯이
삼국유사도 ‘술이부작’ 기록

올 한해 ‘삼국유사’ 연재 통해
신화의 합리적 설명에 노력

실제 본문에서는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기록되지만, 중심 이야기가 신라인만큼 왕력에서는 신라를 맨 위에 두었고 칸의 높이도 가장 높다. 중국이 그 위에 있어도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이 중국의 어느 사건, 어느 시대에 일어난 일인가를 보다 쉽게 비교할 수 있도록 한 편집의 묘인 듯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본문에서는 가장 늦게 다루어지는 신라이지만 사실은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처럼 본문에서는 각각의 나라를 ‘종적’으로 소개하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연표에서 ‘횡적’으로 정리해 보여줌으로써 입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 북한이 발굴했다고 주장하는 평양 단군릉. 그 진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진)

그런데 본문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고조선에서 시작한다. 고조선이 왕력에서 제외된 것은 아마도 일연 스님 당시에는 고조선의 역대 제왕들을 기록할 만큼 상세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실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왕력에서도 제외된 만큼 신화 속의 나라, 전설의 나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왕력의 고구려 시작 부분을 보면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 즉 고주몽을 ‘단군의 아들(壇君之子)’이라고 했다. 고구려의 시작이 고조선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물론 까마득한 과거 고조선을 세운 단군이 주몽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주몽은 천신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 난 아들이라고 분명히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 선생 같은 분은 이미 ‘조선상고사’와 같은 저서에서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것은 직접 부자관계라는 뜻이 아니라 단군을 계승한 고조선 왕가를 잇는 인물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풀이하고 있다.

올해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요직 인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한참 시끄러웠던 부분이 뜻밖에도 고조선에 대한 인식 문제였다. 때문에 소위 재야사학자와 강단사학자들 간의 의견충돌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었고, 상대방에 대해 ‘식민사학’이니 ‘국뽕’이니 하며 폄하하는 말들이 오갔다. 정치판에서 의견이 다르면 ‘빨갱이’니 ‘보수꼴통’이니 폄하하는 모습의 역사학 버전이었다. 당시 논쟁의 핵심은 낙랑의 위치 문제처럼 보였다. 낙랑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세운 한사군의 하나다. 사군 중에 낙랑이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낙랑이 수도였던 평양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학계는 낙랑을 평양 인근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이는 ‘삼국유사’ ‘낙랑국’조에서 “낙랑은 곧 평양”이라고 명시된 부분도 있고, 실제 이 지역에서 수많은 한나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과거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사에 있던 때에는 낙랑실이 삼국의 역사 일부로서 함께 전시되고 있었고, 어린 시절 전시를 둘러보다 이 낙랑실에 들어섰을 때 마치 용산 미군 부대 안에 들어선 것 같은, 즉 우리나라이지만 우리나라가 아닌 이질적 느낌이 들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이 실을 아시아실의 일부로 전시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맥락이 끊어져 버렸다. 중국 수입품인 셈이니 그도 그럴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몽고 간섭기나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들도 전부 아시아실에 두어야하는 것일까 의문도 들었다. 어쩌면 우리의 역사란 우리가 밟고 있는 우리의 땅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총체일 수도 있지 않을까.

▲ 낙랑군 평양입지설의 단서가 된 평안남도 대동군 선교리 출토의 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 기원전 41년(국립중앙박물관 원판사진).

여하간 그런 가운데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사는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했다’고 했기 때문에 낙랑의 위치가 평양이라면, 그 평양은 곧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성인 셈이다. 그런데 재야사학자들은 끊임없이 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성, 즉 왕검성은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재야사학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고조선의 강역이 매우 넓었고, 중국과 비교해 서로 대등한(때로는 능가할)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다는 점인데, 그것의 상징적인 표식이 바로 고조선의 수도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고조선 수도=평양=낙랑’ 설은 이 주장에 절대적인 걸림돌이 되었고, 이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낙랑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평양에 위치했음이 밝혀진 것이었음에도 재야사학이 무모하게 이를 조작이니 식민사학이니 부정하는 것에서 이론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실 그런 주장은 이미 정인보 선생이 제기한 것인데, 그때 이미 이론적으로 세련되게 완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무턱대로 이러한 주장을 ‘국뽕’이라 몰아붙이고 역사학자가 아니면 역사를 논하지 말라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비판 역시 실망스러웠다. ‘국뽕’, 이는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꼬는 이야기 같은데, 재야사학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마치 우리 민족이 실은 대단하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은 그야말로 ‘곡(曲)을 바루어서 직(直)을 지남’이었다. 역사학이 얼마나 우리 국민들에게 재미없는, 그야말로 강단에서 혼자 떠드는 이야기였으면 소위 비역사학전공자들까지 이렇게 나서야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꼭 수도가 요동에 있어야만 고조선이 위대한 것일까, 고구려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지만 역시 아시아의 강대국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낙랑의 위치 문제에만 매달리는 듯한 재야사학의 주장에 안타까운 마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근래 고고학계에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즉, 낙랑은 평양에 있었지만,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양에서는 고조선의 수도로서의 유물이나 유적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랑=평양”은 맞지만 “낙랑=고조선 수도”는 아닐 수 있다는 새로운 논쟁의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어쩌면 미리 어떤 주장을 세워놓고 자료를 끼워 맞추기보다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자료를 모두 모아놓고 이것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배열하는 합리적 접근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인 것 같다.

▲ 카고 컬트. 2차대전 중 연합군이 군비행장 등에 군수품을 낙하하는 것을 경험한 원주민들이 가짜 비행기를 만들어놓고 조상신이 하늘에서 물건을 내려주길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일연 스님은 불교사뿐 아니라, 이와 같은 고대사 논쟁의 첫 촉발자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재삼 강조되어 마땅하다. 고조선은 ‘삼국유사’보다 1년 앞서 1280년 편찬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도 “요동에 따로 또 천지가 있으니...(중략) 누가 처음 풍운의 나라를 열었는가, 천제의 손자 단군이라네”라며 다뤄지고 있지만, 아마 두 저작은 거의 동시라고 볼 수 있고, 또 사서로서는 ‘삼국유사’가 더 자세하다.

고조선 논쟁은 ‘한단고기’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더욱 극명하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설로 보는 성향과 식민사학을 극복할 대안으로 보는 시각까지. 이는 ‘화랑세기’에 대한 논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책을 그래서 사서(史書)와는 구분하여 위서(僞書)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약 전설 같은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해서 위서라고 한다면 ‘삼국유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올해 연재한 ‘삼국유사’ 속의 여러 신비스런 이야기들이 어찌 사서나 정사에 실릴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일연 스님도 이를 ‘사(史)’라 하지 않고 ‘사(事)’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럼에도 ‘삼국유사’는 수많은 역사학자들에게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단고기’가 소설로 여겨지는 것에 비해 일연 스님이 위대한 이유이다. ‘한단고기’가 이벤트라면,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사실인가 아닌가의 차원이 아니다. 우선 소위 말하는 ‘위서’란 비록 작자는 모르지만 어느 누군가의 창작물로 여겨진다. 반면에 ‘삼국유사’는 비록 일연 스님이 작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은 창작이 아니라 여러 전해지는 자료들을 모은 것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기록할 뿐 덧붙이지 않았다”고 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그래서 ‘논어’를 ‘경전’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단지 창의력 없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화랑세기’를 ‘사(史)’로 보고자 하는 견해도 이 내용이 도저히 한 사람의 창작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며 다양한 사건들과 거미줄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글인 이상, 아무리 다양한 글에서 모았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사람이 쓴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근거로 삼는 여러 사서들, 특히 중국의 정사들도 실은 사마천이든, 사마광이든 결국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쓰인 것이고,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러한 글들이 오로지 ‘술이부작’한 것이라면 역사학계는 그렇게 수많은 논쟁을 낳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똑같은 사서를 보고 수많은 논쟁이 난무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논쟁은 어차피 재야와 강단 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모두 사람이 쓴 것이기에 그렇다.

▲ 문무왕릉비 부분. 신라왕실이 흉노왕 투후 김알제의 후손이라고 밝힌 명문이 있어 신라의 북방기원설과 연관하여 많은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구전된 전설들은 오히려 역사는 아니지만, 그것은 특정한 정치 혹은 사상적인 목적 없이 그저 전해진다는 점에서 모두가 함께 기록한 이야기이다. 비록 은유적이고 비유적으로 표현되었지만, 궁극적으로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적자 생존한 그 사회에 최적화된 기록인 셈이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당시 멜라네시아, 뉴기니 지역에 주둔하던 연합군을 위해 군용화물기가 화물을 낙하하는 것을 보고 원주민들은 이것이 신이나 조상이 내려주는 것으로 간주하여 군인들이 철수한 뒤에는 가짜로 비행기를 만들어놓고 다시금 하늘에서 화물이 내려오길 기다렸다고 한다. 즉, ‘카고 컬트(Cargo Cult, 화물숭배)’다. 먼 훗날에 이 관행이 역사로 남아 연구된다면 그저 전설로 치부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를 두고 외지인들의 화물 낙하 이야기가 그렇게 신화화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환웅의 하강과 웅녀의 이야기, 해모수와 유화의 전설, 가야 허황옥이나 신라 석탈해가 바다를 건너온 이야기, 신라가 스스로를 흉노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 주장한 사실 등은 역사인가 실재인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다. 만약 이러한 내용들이 작위적인 것이라면, 세상에 작위적이지 않은 글은 없으며, 만약 남겨진 사서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전설적인 구전 역시 나름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일연 스님은 결국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술이부작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떠도는 전설들을 신화로 만들었다. 신화는 비단 역사학뿐 아니라 그리스 신화처럼 인류학적으로, 문화학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 이번 연재에서는 신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해보고자 한 것도 있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삼국유사’의 그 어떤 내용도 허투루 써진 것이 없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것이 우리가 고전을 읽고 다시 또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양한 논쟁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이때에 역사와 전설을 적절히 구사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한 결과 ‘절대원전(絶對原典)’이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찬한다.

구름 속에 갇혀 잊힌 오래된 이야기
스님 붓끝으로 그 구름 법운으로 바뀌니
비로소 용이 되어 다시금 날게 되었네
머리는 역사요 가슴은 신화인 그 이름, 유사여라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21호 / 2017년 1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