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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범종 [끝]

기자명 정진희

지극한 음률로서 중생들에 불법 전하다

▲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 높이 333㎝·입지름 227㎝, 771년, 국립경주박물관.

섣달 그믐날 종을 33번 울리는 의식을 통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제야의 종은 1953년부터 시작되어 이제는 연말이면 꼭 거쳐야하는 행사가 되었다. 종을 타종하며 옛 것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이 전통은 원래 사찰에서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 밤 108번뇌를 떨쳐내는 의미로 범종을 108번 타종하는 법식을 본 딴 것이다. 사찰에서 종을 울리는 법식은 ‘증일아함경’에 나오는 7월 보름 부처님 말씀을 받들어 대중을 모으는 신호음으로 간타(GHANTA)를 울리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범종을 치는 횟수는 법식에 따라 다른데 저녁에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28처 하늘에 종소리가 닿기를 염원하며 28번을 타종하고 새벽에는 선견천을 포함한 33천에 울려 퍼지라는 기원을 담아 33번 종을 친다.

모든 면서 세계 제일은  한국 종
천지 진동하는 부처되는 가르침

항상 비어 있어 울릴 수 있으니
울림은 끊임없고 영원히 이어져
무거워서 돌지 않고 항상 올곧아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통행금지를 알렸던 타종의 횟수도 사찰과 같아서 저녁에는 밤하늘 동서남북의 별자리인 28수를 상징하여 28번치고 새벽에는 28수에 하늘 중앙 다섯 별자리를 합하여 33번 쇠북을 울렸다. 승계와 속계에서 종 치는 의미는 차이를 보이지만 횟수가 동일한 것으로 보면 아마도 통행금지를 알렸던 민가에서 종치는 의식도 사찰의 타종방법을 따와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한국 종(Korean Bell)’이라는 학명이 붙을 만큼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의 종과도 다르다. 이 두 나라의 종은 꼭대기에 소리를 깊고 넓게 퍼지게 하는 음통이 없고 종을 매다는 용도의 용뉴도 머리가 두 개 달린 쌍룡이다. 그리고 종의 몸통에 새긴 문양도 전체적으로 여백이 없이 빽빽이 채워 답답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 종은 한 마리 용으로 만들어진 용뉴장식 옆에 종의 몸체와 맞뚫려 있는, 만파식적을 형상화했다는 대나무 형태의 음통이 있다. 종의 몸통에 새겨진 문양에 있어서도 일단 종의 어깨부위를 의미하는 상대와 몸통 끝 부분인 구연부에 보상당초문양의 띠를 둘러 가장자리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상대 아래는 9개의 유두가 새겨진 네모난 유곽 4개를 새겨 넣고 그 아래 몸통에 주악비천상을 두는 것이 전부이다. 절제를 통한 정돈된 여백의 미를 살려낸 우리 선조의 미의식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 성덕대왕 신종의 비천.(사진 ‘한국미의 재발견 8’, 솔.)

한국 종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외형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실질적인 종의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귀로 듣는 웅장한 울림소리에서도 비교할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예술품이다.

특히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는 맴돌림 현상이라는 긴 떨림 음은 세계 어디의 종도 따라올 수 없다. 성덕대왕 신종에 새긴 명문의 서문(序文) 가운데 ‘비어 있으면서 능히 우니 그 울림은 끊임이 없으며, 무거워서 돌지 아니하니 그 모양이 이지러지지 않는다’라는 글귀는 우리나라 범종의 웅장한 울림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명문에 따르면 부처님의 교법은 천지 사이 진동하는 인간은 들을 수도 없는 너무나도 큰 일승지원음(一乘之圓音)이기에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신종(神鍾)을 만들었다고 했다.

고로 범종의 울림은 부처의 맑고 고운 음성으로 전달되는 진리의 말씀이기에 사찰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울리는 종소리는 세상으로 퍼지는 천상의 음률이고 사바세계 살고 있는 대중들에게 부처의 진리를 체득하게 하는 법음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은 통일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이다. 이 종이 원래 소장되었던 사찰은 알 수 없고 1469년 안동의 누문에 걸려 있던 것을 국명에 의해 상원사로 옮긴 것이라 상원사 동종으로 부르고 있다. 상원사 동종의 몸체 중앙에는 천공에서 천의를 날리며 공후와 간(竿), 생황(笙簧) 등을 연주하는 천인이 쌍을 이룬 주악비천 4구가 새겨져 있다.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상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기 위해 솟구쳐 흩날리고 있는 긴 천의 자락을 마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밑에서 바람이라도 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생황을 부는 천인의 볼은 바람이 들어가 잔뜩 부풀어있으며 그 옆, 두 눈을 살포시 내려 뜨고 긴 손가락으로 공후의 현을 튕기는 천인의 얼굴에는 거장의 기품이 서려있다. 쇳물을 녹여 주조한 종의 표면에 조각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치 살아있는 연주자들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우리나라 주악비천 가운데 최고로 평가 받는 이 비천상은 선조들의 우수한 주조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되어진 매우 세밀하고도 조형미가 뛰어나 ‘세밀가귀’라는 문구가 딱 맞는 수작이다.

통일신라시대 범종 대부분이 주악 비천상을 몸체에 새기고 있는 것에 반해 771년에 주조된 성덕대왕 신종은 유일하게 한 쌍이 아닌 단독상이면서 악기가 아닌 손에 드는 향로를 쥐고 있는 공양비천이다. 아마도 성덕대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국가적인 발원을 담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종이라는 점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보다는 경건하게 공양하는 비천상이라는 이례적인 모습을 택하였을 것이다. 천인의 두 손에 모아 쥔 향로는 꽃잎이 벌어진 활짝 핀 연꽃송이와 같고 연화대좌 위 무릎을 꿇은 모습은 퍼져가는 종소리를 따라 어디라도 날아갈 듯 발등을 땅에 댄 머무는 자세가 아니라 움직임이 용이하게 발등을 접어 엉덩이를 받쳐 올린 형태이다.

▲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 몸체와 유곽의 주악비천상, 725년, 강원도 평창군 상원사.(사진 : ‘범종 형, 색, 감’, 문화재청)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한 곳도 놓치지 않으려했던 작가의 세심함은 마침내 비천의 시선처리에서 극을 달린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살포시 고개를 들어 천공을 바라보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진실된 마음으로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의 기원을 담아 올리는 공양자의 간절함이 느껴져 도취될 정도이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만든 종이니 당연히 당대 최고의 예술가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이지만 표현하고자하는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뿐 아니라 궁극의 아름다움까지 갖춘 작가의 기량에는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다. 

올 한해도 여기저기서 많은 소리들이 있었다. 가슴에 담고 싶지 않은 나쁜 소리들을 다 떨쳐 버리라고 아마도 한 해가 저무는 세모의 계절은 성탄절의 종을 비롯해 제야의 종까지 종소리와 함께하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있지 않아 변함없이 들려올 그믐날 밤 종소리가 부처님의 법을 알리는 진실된 울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올해는 꼭 마음속에 새겨 보아야겠다.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 jini5448@hanmail.net
 


[1421호 / 2017년 1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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