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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이에겐 자비 한 술이 부처”

  • 상생
  • 입력 2018.01.03 17:00
  • 수정 2018.01.03 17:07
  • 댓글 1

노숙자 무료급식소 마이트리

▲ 평균 150명이 찾는 무료급식소 마이트리에서 자원봉사자들은 잔치음식을 만든다는 원칙을 갖고 정성을 다해 풍성한 한끼를 준비한다.

스님이 칼을 빼 들었다. 시선 끝에서 칼은 리드미컬하게 춤을 췄다. 스님 입술 사이로 흥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옆에서 함께 칼질하던 재가자는 흐뭇하게 웃었다. 익숙한 손놀림은 일류 요리사급 어슷썰기를 재현했다. 무자비한 칼은 도마 위 대파와 당근을 일정한 간격으로 비스듬히 토막을 냈다.

매월 둘째·넷째주 수요일에
천안 서부역 앞서 점심공양
재료구입·조리·배식 등 봉사
2014년 시작…햇수로 5년째

2017년 12월23일, 한겨울도 칼을 빼 들었다. 살점 떼어 갈 듯한 영하 10도의 바람이 천안 서부역 앞을 휘저었다. 몸과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이 서성였다. 노숙자들이었다. 폐지 실린 리어카와 유모차를 끌고 온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었다. 모락모락 따듯한 김이 서린 밥 한 공기 나오려면 서너 시간이나 남았지만 아침부터 만원이다.

“어서들 오세요. 오늘 패션은 남다르네요. 추운 데 간밤에 잘 보내셨어요?”

분홍 조끼 입은 혜정 스님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천안 서부역 앞 특수임무 유공자 사무실 무료급식소로 들어오는 이들도 반가운 눈치다. 한 달에 두 번 만나는 스님이다. 둘째, 넷째 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재현되는 풍경이다. 윙크로 눈인사 나누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천안 자원봉사단체 ‘마이트리(cafe.daum.net/Maitri, 단장 혜정 스님)’가 설립된 2014년 그해 9월부터 무료급식 인연이 시작됐으니, 2018년이면 햇수로 꼭 5년째다.

평균 150여명이 무료급식소를 찾는다. 저소득층 독거노인이거나 노숙자들이다. 노인 중 90% 이상이 편부, 편모, 조손가정의 노인들이다. 80%는 오후 10시까지 어떤 보호자도 없는 상태다. 점심을 거르거나 저녁은 아예 먹지 못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다. 시선 가는 곳에 마음 있다. 이들에게 마이트리 시선이 닿았다.

애당초 마이트리 설립 취지였다. 자비에서 ‘자(慈)’는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리다. ‘진정한 친구’라는 뜻이다. ‘비(悲)’는 산스크리트어 ‘카루나’, 즉 신음이라는 의미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웃들 곁을 지키는 친구로서 고통을 나눠 짊어지겠다는 봉사단체가 마이트리다. 13개 종교 및 시민사회단체가 활동하던 무료급식소에 마이트리가 이름을 올렸다. 대부분 기독교 성격 단체였다. 불교계에선 천수천안자비나눔불교봉사단 오직 1곳만 참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 마이트리 단장 혜정 스님이 따듯한 밥과 반찬이 담긴 식판을 건네고 있다.

상황을 설명하던 혜정 스님이 갑자기 조리실로 향했다. 조리실이 분주해졌다. 줄이 길어질수록, 식당 안이 붐비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할수록 그랬다. 진산 스님이 라면을, 혜련 스님이 하얀 가래떡을 정리했다. 도정 스님과 혜명 스님은 국거리와 반찬거리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재가 봉사자들도 육개장에 들어갈 나물을 삶고 데치고, 두부를 조렸고, 밥을 뜸 들였다.

밥 냄새가 퍼진 급식실은 들떴다. 혜정 스님이 나섰다.

“더 드실 분은 다 드시고 또 줄 서서 음식을 받아 가시면 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노는 입에 염불하시고 항상 관세음보살을 찾으세요.” “부처님, 감사합니다. 매번 음식이 맛있어요.”

이들의 칭찬 그대로였다. 무료급식날이면 마이트리는 새벽부터 시장에서 식재료를 직접 골라 조리한다. 매번 메뉴도 다르다. 하지만 원칙이 있다. 잔치 음식 느낌이 나도록 한다. 잡채 등이 자주 식단에 오른다. 누군가에게 존중받고 대접받는 인상을 받도록 한 마이트리의 배려다.

혜정 스님은 “저잣거리에서 함께 뒹구는 게 불교다. 주린 배 달래는 따뜻한 자비 한 술이 부처님”이라며 “비록 한 끼 식사이지만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이강선(57, 효청) 마이트리 총무도 “처음엔 함께 밥을 먹는 일이 꺼려졌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아침 일찍 무료급식소를 찾아 따뜻한 밥 한 끼 드시고 가시는 뒷모습을 보면 그만둘 수가 없다”고 했다.

초조하게 무료급식소를 찾았던 절뚝 걸음이 느긋해졌다. 몸도 마음도 넉넉해졌다는 증거다. 뒷짐 진 손이 움켜쥔, 폐지 위에 실린 검정 봉지에 새해맞이 하얀 가래떡과 라면이 담겨서다. 마이트리의 마음이 고마워서다. 오늘 저녁, 주린 배도 따듯하다.

천안=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1422호 / 2018년 1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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