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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종교 언어

‘성탄절’ ‘교인’ 등은 보통명사
개별 종교 용어로 적절치 못해
과학계에도 독선적 용어 만연

지난해는 불교계도 다사다난했다. 이 가운데 ‘석가탄신일’이 올해부터 ‘부처님오신날’로 공식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은 불자들에게는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불교계에는 ‘석가탄신일’과 관련해 아픈 기억이 적지 않다.

기독탄신일은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부터 미군정에 의해 공휴일로 지정됐지만 부처님오신날은 이로부터 30년이 지나서야 공휴일로 지정될 수 있었다. 당시 불교가 1600년 역사를 지닌 국내 최대 종교였던 반면 개신교는 5대 종교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가톨릭은 5대 종교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극히 편파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불교계가 1968년 봉축 때부터 ‘부처님오신날’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해 왔으나 1975년 정부는 불교계의 요구를 묵살한 채 ‘석가탄신일’로 결정해버렸다. 이후 불교계는 정부에 ‘부처님오신날’로 명칭을 변경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에서도 줄곧 석가탄신일로 불러왔다. 기독탄신일이 정부가 정한 공식 명칭임에도 성탄절 혹은 크리스마스로 부르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한국현대사에서 불교를 비롯한 전통 종교는 약자였고,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기독교는 처음부터 강자였다. 그렇기에 전통종교를 향한 수많은 차별과 왜곡은 필연적이었다. 이는 종교용어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기독교 번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하느님’ ‘하나님’은 ‘한울님’과 더불어 수천 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용어였다. 유대의 신인 ‘야훼(여호와)’는 종교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1992년 원주 지역의 전통종교 대표자가 가톨릭 서울대교구장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를 상대로 ‘하느님 명호 도용 청구의 소’를 법원에 제소하는 일도 있었다. ‘갓(God)’이라고 쓰면 될 것을 한민족의 고유명사를 쓰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고유한 경배심을 가로채는 참칭이며 도용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기독교계에는 상대 종교에 대한 배려를 찾기 힘든 용어들이 적지 않다. ‘성탄절’ ‘성경’ ‘교인’ ‘교황’ ‘성가’ ‘복음’ 등 용어는 결코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다른 종교에도 종조나 교주의 성스런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과 그분의 가르침을 담은 ‘성경’,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교인’이 있기 때문이다. ‘교황’도 가톨릭교의 황제일 뿐이지 모든 종교의 황제가 될 수는 없다. 설령 기독교계 내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일반 언론까지 비판 없이 쓰는 것은 무책임에 가깝다.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른다고 언론에서도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 종교 용어에 대한 횡포는 학계에도 팽배하다. ‘종교개혁’은 16~17세기 유럽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라면 늘 개혁과 쇄신이 있어왔다. 그럼에도 ‘기독교 개혁’이 아니라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서구 중심적 사고에 불과하며, 다른 종교전통의 개혁을 무시하는 일이다. 이는 버트런드 러셀이 ‘서양철학사’(1946년)를 펴내기 이전에 대다수 철학자들이 동양철학 등은 전혀 언급 않으면서도 ‘철학사’로 명명했던 것과 비슷하다.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과학계는 한술 더 뜬다. ‘현대 과학, 종교 논쟁’ ‘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 ‘과학과 종교’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종교, 과학에 말을 걸다’ 등 수많은 책들에서 언급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일 뿐이다. 서양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쓰여진 책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국내에 들어오면서 ‘종교’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개신교의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비판적으로 다룬 ‘Intelligent Thought’는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불교는 과학적이고 기독교는 비과학적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서구 중심의 틀에서 벗어난 집필과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교’라는 용어를 표방했다면 기독교 외의 ‘종교’도 다뤄야 합당하다. 그렇지 않으면 서양 중세시대에 기독교의 독선과 획일화에 맞서 왔던 과학이 오히려 이제는 독선과 획일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 이재형 국장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의 지적처럼 ‘언어의 점유는 사유의 점유’와 직결된다. 제국주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종교 용어를 둘러싼 제국주의 사고와 차별은 여전히 팽배하다. 여기에 학계와 언론까지도 합세하고 부추기고 있다. 세월이 간다고 이러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불교계에서 지적하고 개선시키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바뀔 수 있다.

이재형 국장 mitra@beopbo.com

 

 

 

[1423호 / 2018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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