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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고대불교-불교의 전래와 수용 ①-고구려

고구려, 격의불교서 열반종 이르기까지 중국불교 폭넓게 수용

▲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일본불교 발전에 기여했으며 중국불교 발전에도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은 평양 남포시 소재 덕흥리고분.

불교는 기원전 6〜5세기 즈음 인도에서 성립되어 기원후 1세기 전후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리고 다시 4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고대국가로 한창 발전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가장 선진적인 국가는 고구려였으며, 백제와 신라가 그 뒤를 이었다. 불교의 전래도 고구려가 가장 일렀으며, 백제와 신라가 그 뒤를 이었다.

불교전래의 공적인 기록은
소수림왕 2년 전진서 수용

기록이 풍부한 신라에 비해
고구려·백제는 상대적 빈곤

중국의 사료인 ‘양고승전’에
공 기록보다 이른 교류 남아

고구려 승려 이름은 없지만
격의불교 이해 뛰어난 학승
당고승전·해동고승전에
중국교학 배워온 기록 전해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소수림왕 2년(372)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가 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한 때였다. 그보다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에는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와서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신라에서는 가장 늦은 눌지마립간(417〜458) 때에 고구려를 거쳐온 아도(阿道), 또는 묵호자(墨胡子)에 의하여 전래되었지만, 박해를 받아 순교자가 발생하는 등 상당기간 알력을 겪은 끝에 공인된 것은 법흥왕 22년(535) 즈음이었다. 오늘날 불교사학계에서는 삼국의 불교 전래와 공인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이렇다 할 알력을 빚어냄이 없이 순탄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에 비하여 신라는 순교자를 배출할 정도로 100여년 간의 알력과 진통을 겪은 원인으로 신라의 후진성과 폐쇄성이 지적되어 왔다.

나도 이러한 지적에는 대체적으로 공감하지만, 그밖에도 자료상의 문제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신라의 불교 전래와 수용 과정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와 고승전(高僧傳) 이외에 고기(古記)와 금석문 등 비교적 다양한 자료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도 대단히 소략할 뿐만 아니라 고기류나 금석문류의 자료들은 일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중국의 고승전이나 일본 측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전래와 수용 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실을 전연 알 수 없으며, 그 뒤의 전개과정도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국내 불교교단의 상황이나 사상·신앙의 내용도 단지 외국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삼국시기의 불교사,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사에 대한 이해는 자료 면에서 원천적으로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1) 고구려의 불교전래와 수용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에서 불교를 최초로 받아들인 때를 제18대 소수림왕 2년(372)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도 먼저 고구려 사람과 중국불교와의 접촉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예를 들면 ‘양고승전’ 축잠(竺潛)조에 의하면 동진(東晋)의 승려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이 고구려 도인(道人)에게 서신을 보냈었다는 사실이다. 소수림왕 2년(372) 보다도 6년 전에 세상을 이미 떠난 지둔이 그 생전에 고구려 도인에게 글을 보냈었다는 사실은 고구려에서 이미 불교를 이해하였거나, 신봉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그런데 이 도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해동고승전’에서는 “석망명(釋亡名)”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고구려의 불교 전래에 어떤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고구려 도인, 곧 승려(당시의 금석문에 의하면 초기불교에서는 승려를 도인이라고 하였음)에게 보낸 글의 내용은 역시 동진의 명승인 축잠법심(竺潛法深, 286〜374)의 덕행을 칭찬한 것인데, 지둔과 축잠은 모두 중국 강남 지방에서 활약한 인물이었으므로 고구려 도인도 강남지방에 유학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둔과 축잠이 모두 격의불교(格義佛敎)의 대가로서 고답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하면 고구려 승려도 상당한 수준의 학승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격의불교는 불교사상을 유사한 중국사상에 맞추어 이해한 불교를 말하는데, 특히 중국의 초기불교에서는 반야부 경전의 공(空)사상을 노장의 무(無)자를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격의적 사상으로는 본무의(本無義)·심무의(心無義)·즉색의(卽色義) 등 3설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 본무의는 축잠의 설이고, 심무의는 축잠의 제자인 축법온(竺法蘊)의 설이며, 즉색의는 지둔의 설로 전해지고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 출신 승려 가운데는 중국불교사에서 최초로 불교사상을 이해하는 격의불교 단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 시기도 소수림왕대보다 앞섰던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소수림왕의 조부인 미추왕 14년(313)에 이미 낙랑군을 축출하고 중국의 침략세력과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화북과 강남의 왕조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고구려 불교의 초전을 300년대 중반 이전으로 올려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본다.

소수림왕 2년(372) 6월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사신과 함께 순도로 하여금 불상과 경문을 보내온 사실은 국가 사이의 외교경로를 통한 문화교류의 일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공적인 교류는 계속 이어져 2년 뒤에는 아도(阿道)가 왔으며, 그 이듬해(375) 2월에는 성(초)문사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이것을 해동 불법의 처음이었다고 한 것은 최초의 공적인 전래와 교단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전진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순도를 보내온 것은 단순한 문화교류로서만이 아니고 정치외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낙랑군을 축출한지 4년 뒤에 북방호족들에게 쫓기어 양자강유역으로 남하한 한(漢)민족이 동진(東晋)을 세우고 있었고, 대륙 북쪽에서는 5호16국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인접한 퉁그스 계통인 선비족의 전연(前燕)을 견제하기 위하여 티베트 계통의 저족(氐族)의 전진(前秦)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소수림왕이 즉위하기 1년 전에 이미 전연은 전진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소수림왕은 전진과 적극적인 평화 관계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전진으로부터 새로운 제도와 문화를 수입하면서 국가제도의 정비와 정신적 통일을 추구하였다. 태학의 설립, 율령의 반포와 함께 불교를 수용한 것은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편 전진왕 부견은 5호16국 가운데서 가장 독실한 호불의 군주로 일려졌다. 그는 불교에 의한 치국을 목적으로 하여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석호(石虎)의 존경을 받던 불도징(佛圖澄)의 제자인 태산승랑(太山僧朗)을 신봉했으며, 379년 양양을 공략하여 후세에 중국불교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되는 도안(道安)을 얻었다. 그리고 382년에는 쿳차(龜玆)의 구마라습을 얻기 위해 여광(呂光)을 서역에 보내서 쿳차를 치고 구마라습을 데리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구마라습이 장안에 온 것은 401년으로 부견이 죽고 전진이 멸망한 이후였다. 그러므로 전진의 부견 당시 불교는 아직 격의불교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더욱 구마라습에 의해 번역된 대승경전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순도와 아도 등에 의해 전래된 것은 그 이전 축법호(竺法護)에 의해 번역된 대승경전들이거나 불도징이 전해온 주술불교·계율·선관 등의 불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소수림왕의 아우인 고국양왕은 그 말년(391) 3월에 하교하여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고 하였다. 또한 해당 관청에 명하여 국사(國社, 社稷)를 건설하고, 종묘를 수리케 하였다. 이는 불교를 국가의 공인종교로 선포함과 함께 사직과 종묘의 국가제사의 제도를 확립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어 그 다음해(392) 아들인 광개토왕은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세웠는데, 대외적인 정복 활동을 강력하게 추진시키기에 앞서 새 국도의 예정지에 불교 사찰을 먼저 창건한 것은 의미 깊은 일이었다. 실제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어 새 국도를 경영한 것은 다음 왕대인 장수왕 15년(427)이었지만, 국내성이라는 협착한 산골짜기의 야영도시로부터 넓은 평야에 자리 잡은 정치도시·경제도시·문화도시로서 그 수도의 발전을 기획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제국(帝國)으로서의 완비된 제도를 갖추는데 불교공인과 사찰건축이 그 시발점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 불교의 수용과 전개과정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가장 아쉬운 점은 불교교단의 상황과 불교사상의 내용을 알려주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인데, ‘당고승전’권8 석법상전(釋法上傳)과 ‘해동고승전’권1 석의연전(釋義淵傳)은 특히 주목되는 자료이다. 두 고승전은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25대 평원왕 18년(576) 즈음에 대승상 왕고덕(王高德)이 승려 의연(義淵)을 북제(北齊)의 도읍인 업(鄴)으로 보내어 당시 도통(都統)인 정국사(定國寺)의 법상(法上, 495〜580)에게 불교의 시말연유와 당시 중국불교의 교학에 관하여 배워오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법상은 지론종(地論宗) 남도파(南道派)의 혜광(慧光)의 제자로서 ‘십지경론’ ‘능가경’ 등을 강설하고 그 주석서를 지었다. 동위(東魏)와 북제시대에 도통으로 임명되었으며, 특히 북제 문선제(文宣帝)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황제와 황후의 계사가 되었다. 그의 제자에는 정영사(淨影寺)의 혜원(慧遠)이 있었다. 고구려의 대승상 왕고덕과 승려 의연의 행적은 전연 알 수 없으나, 북제 문선제의 치세와 업도의 융성한 불교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제 문선제의 시대는 평원왕의 부왕인 양원왕(545〜558)의 치세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년 6월과 7년 5월, 그리고 11년 11월에 사신을 북제에 보내고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승려들도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평원왕 때 의연의 파견도 그 일환이었을 것으로 본다. 의연이 법상에게 질문한 내용은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연대와 황제의 이름, 제(齊)와 진(陳)의 불법의 선후와 당시까지의 년대, 그리고 ‘십지경’ ‘대지도론’ ‘지지론’ ‘금강반야론’ 등의 찬술자와 찬술연기 등이었으며, 이에 대한 법상의 자세한 대답이 전해지고 있다.

대승상 왕고덕이 의연을 중국에 파견하여 불교사의 대강과 지론종의 경론을 비롯한 대승경론의 찬술자와 그 찬술연기 등을 배워오게 하였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일찍이 격의불교 단계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 중관학파 계통의 삼론종과 유식학파 계통의 지론종, 그리고 말기 영류왕·보장왕 때 보덕(普德)의 열반종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불교학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23호 / 2018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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