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노파마 ②
3. 아노파마 ②
  • 김규보
  • 승인 2018.01.1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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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승 고타마 붓다께 오늘 저는 귀의하려 합니다”

“아버님, 온갖 금은보화에 감싸여 손끝에 먼지 하나 닿지 않던 세월이었습니다. 산해진미에 입을 놀리며 진귀한 보석들로 몸을 치장하였고 하인들의 달콤한 말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 무엇이든 가지 아니한 채 끌어올 수 있었으니, 저에게 부족함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풍족함 뒤 찾아오는 공허함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커져
아버지 만류에도 구도 다짐


“네 말이 맞고 또 맞다. 너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풍족함을 누렸다. 이제는 공주가 되고 왕비가 되어 세상의 우러름까지 받게 될 터인데, 그와 같은 삶은 나조차 들어본 적 없구나. 땅에서 나 물과 불이 기른 모든 것을 아울렀고 지금부터는 공기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내 딸아, 선택하여라. 그리하여 애비에게 행복을 선물해다오.”

아버지 맛자의 충혈된 눈이 욕망의 빛으로 번뜩였다. 오래 묵힌 등창에서 터져 나온 누런 진물이 지독한 냄새를 퍼뜨리는 듯했다. 아노파마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눈을 거두고 창문 넘어 밤하늘을 응시했다. 별들은 달무리가 끝나는 곳부터 지평선에 이르기까지 빼곡하게 자리 잡고 밤하늘의 허허로움을 빛으로 메우고 있었다. 공허 속에서 핀 꽃, 별들이여….

삶의 기억들을 머리에 새기기 시작한 유년기 무렵부터 별은 아노파마의 유일한 친구였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쾌락에 흠뻑 젖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창문에 기대 밤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태양이 서쪽으로 사라진 뒤에야 드러나는 하늘의 본모습은 공허에 잠긴 어둠이었다. 한낮의 짙푸름은 빛을 반사한 허상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몸에 두른 보석들을 벗겨내면 무엇이 나타날까. 어떤 육신도 결국엔 허물어져 저 밤하늘처럼 어두운 땅으로 돌아가게 마련이거늘, 이 몸을 치장하고자 노력함에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밀려드는 의문과 원인 모를 공포감에 아노파마는 몸서리쳤다.

“아버님,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한치 앞도 구분키 힘든 암흑을 헤매며 껍데기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풍족함이 커지는 만큼 빈곤함으로 메말라갔으니 앙상한 나뭇가지였고 날지 못하는 새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또한 보았습니다. 태양이 저문 자리에서 별들은 마침내 사방으로 빛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공허 속에서 핀 꽃, 별들은 한낮의 치장이 자취를 감춘 뒤 비로소 따사로운 빛으로 반짝였다. 아노파마는 생각했다. 어둠만이 하늘의 본모습은 아니며 공허가 하늘의 전부는 아니다. 별은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한낮의 태양에 잠시 가렸을 뿐, 세상 모든 육신이 땅으로 떨어져도 굳건히 하늘에 박힌 채 밤하늘을 수놓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매일 밤, 창문에 기대 제 안의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손에 잡힐 듯 멀어지는 별들에 이르고자 무던히 노력해왔습니다. 지금껏 집을 나서지 않았던 건,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함이었으나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오랫동안 품어온 결심을 이행하고자 합니다.”

맛자의 욕망 어린 눈빛을 반사한 아노파마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확신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맛자의 마음을 깊숙이 찔렀다. ‘정녕 이렇게 되는구나. 너를 이렇게 잃는구나.’ 고개를 떨구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맛자가 흐느끼는 모습을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던 아노파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오늘 들은 말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만큼 혼란스러웠던 맛자였지만 딸이 낯선 뒷모습까지 보이자 그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딸아. 어디로 가려 하느냐. 애비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네가 가고자 하는 그곳을 일러주어라. 내 너를 보내줄 터이니, 그것만이라도 알아야겠다.”
“저는 오늘 드높은 법에 귀의합니다. 그곳엔 위대한 스승이 있습니다. 예전엔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불렸고 지금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자, 붓다라 불립니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24호 / 2018년 1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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