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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대불교-불교의 전래와 수용 ②-백제

“300년 전반 근초고왕 때 도가사상 매개로 격의불교 전해졌을 것”

▲ 백제불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국보11호 미륵사지석탑.

백제의 불교 전래와 수용 과정에 관한 자료는 고구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너무 희소하다.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에서는 백제에서 불교를 최초로 받아들인 때를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9월로 전해주고 있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뒤 12년만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침류왕 원년 9월에 호승(胡僧, 인도나 서역 출신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들어옴에 왕은 그를 맞이하여 궁내에 있게 하고 예경하니, 불법이 이로부터 비롯하였다. 2년(385)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10인을 득도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침류왕 때 백제에 불교전래

근초고왕 때 기록 유추하면
그때 불교전래 가능성 높아

근초고왕서 손자 침류왕까지
중국 동진과의 교류가 활발

귀족사회였던 백제의 상황
동진 현학적 귀족불교 상통

한성과 웅진 백제 시기에는
백제불교 기록 단편적 전해

사비 이후에 불교기록 풍부
성왕부터 왕의 시호에 영향

용흥사·미륵사 사리봉안기
백제불교 실상 생생히 전해 

또한 ‘해동고승전’에서는 “왕이 교외에까지 나가서 맞이하여 궁중에 모시고 공경히 받들어 공양하였다”고 하였다. 위 두개 자료에서 마라난타가 백제에 온 것은 그의 개인적인 행동인 것같이 기록되어 있지만, 왕이 곧 궁중에 맞아들여 예경하였으며, 불과 5개월 만에 절을 짓고 10명이나 득도시켰다는 것을 보면 국가 사이의 외교경로를 통한 문화교류의 일원으로 이루어진 사실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마라난타가 오기 2개월 앞서 백제에서 동진에 사신을 보냈던 사실을 고려하면, 동진에 파견된 백제의 사신과 동행하여 왔거나, 혹은 동진의 사신에 수반하여 왔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 고구려에서 최초의 불교 전래자로 전해오는 순도가 전진의 사신에 수반하여 왔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 고구려는 북조 왕조인 전진과 친선정책을 추진한데 반하여 백제는 남조 왕조인 동진과 친선관계를 맺은 가운데 각기 국가 사이의 불교 공전(公傳)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불교 전래도 사절을 통한 공전과는 별개로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313년 고구려가 한사군의 중심세력인 낙랑군을 축출하고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될 때에 한강 유역에서 성장한 백제도 북쪽으로 진출하여 대방군을 차지함으로써 두 나라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 뒤 백제는 더욱 발전하여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대외적인 정복전쟁을 추진하여 마한 지역을 점유하는 동시에 서쪽으로는 동진, 남쪽으로는 왜(倭)와 통하여 국제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특히 동진과의 친선정책은 그의 손자인 침류왕대를 거쳐 계속 이어졌으며,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남침세력에 대항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써 백제의 국가성장 과정과 대외관계를 고려하면 백제의 불교전래도 300년대 전반기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근초고왕 30년(375) 태자 때의 근구수왕이 패퇴하는 고구려군을 계속 추격하려고 하자,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니 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다는 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지할 것을 간하였다는 사실을 보아 당시 백제인에게 도가사상이 이미 이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도가사상을 매개로 하여 불교를 이해하던 격의불교가 동진에서 크게 유행되고 있었던 사실을 함께 고려할 때 백제에서 동진을 통해 받아들인 불교는 청담을 즐기는 풍조와 함께 현학적인 귀족불교였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 가운데 귀족세력이 가장 강성하였던 백제의 사회상황도 그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역사에서 다시 불교에 관한 사실이 나타나는 것은 17대 아신왕 즉위년(392) 때이다. ‘삼국유사’권3 마라난타조에 “아신왕 즉위년 2월 왕이 명하여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下敎崇信佛法求福)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료는 그대로 신빙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아신왕 즉위년은 전왕인 진사왕의 말년으로서 진사왕이 세상을 떠난 때가 11월이었기 때문에 그해 2월은 아신왕이 아직 즉위하기 이전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사기’권18 고국양왕조에는 고구려에서도 “고국양왕 9년(392) 3월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여 똑같은 표현의 기사가 전하는데, 고국양왕 9년은 그 아들인 광개토왕이 이미 즉위한 다음 해이기 때문에 시기상으로 문제가 없지 않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원래 392년에 있었던 하나의 사실을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양왕 9년조에,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백제의 마라난타조에 각각 수록함으로써 그러한 모순과 혼란이 발생한 것으로 본다.

한편 백제의 불교사에서는 침류왕 원년(384), 또는 아신왕 원년(392)부터 성왕대(523~554)에 이르도록 1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불교 기사가 전연 보이지 않는다. 일본인 학자 가운데는 백제로부터 일본에의 불교 전래가 성왕대인 552년(일설에는 538년)이었던 사실을 함께 들어 백제의 불교 전래시기를 내려 잡아 524년, 또는 452년으로 주장하는 학자가 있었으나, 이러한 견해는 ‘삼국사기’의 초기연대를 불신하는 식민지사학의 잔재일 뿐이다. 백제의 한성시기(18~475)에는 개로왕이 고구려의 간첩으로 잠입한 승려 도림(道琳)의 꾐에 쉽게 넘어갔던 사실을 보아 백제의 왕실에서 불교는 이미 독실하게 신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웅진시기(475~538)에도 역사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지만, 서산의 삼존마애불이 남조 왕조인 제(齊, 479~502)의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보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성왕 5년(527) 양의 무제를 위해 웅진에 대통사(大通寺)를 세우고 있었던 사실은 양무제의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앞서 무령왕 21년(521)에는 남조의 양에 사신을 보내면서 신라 사신을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양의 사신으로 승려인 원표(元表)가 신라에 옴으로써 불교공인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양의 불교가 백제와 신라의 불교에 미친 영향을 재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웅진시기 불교의 전래 사실로서 주목받아온 사실은 성왕 4년(526) 구법고승 겸익(謙益)이 인도에서 범본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문(五部律文)을 가지고 귀국하여 번역하고, 이어 담욱(曇旭)·혜인(惠仁)이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였으며, 왕도 비담과 신율의 서문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수록된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 의거한 것인데, 서술 내용이 대단히 구체적이어서 쉽게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내용 가운데 겸익을 머물게 하였던 사찰이 신라의 흥륜사였다는 사실, 번역본과 주석서를 목판에 새기려고까지 하였다는 사실 등은 이 자료가 훨씬 후대에 성립되어진 것임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러나 근거 사료로서의 ‘미륵불광사사적’에 대한 더 이상의 확인이 불가능하여 직접적인 비판은 유보하지 않을 수 없다.

사비시기(538~660)에는 불교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는데, 특히 성왕부터 이후 백제왕들의 시호에서 불교의 영향이 확인되며, 또한 왕실과 귀족들에 의한 사찰 건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사실이 전해진다. 우선 성왕대에는 사비로 천도한 이후인 19년(541)에 양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 등의 경의와 공장과 화사 등의 기술자를 요청하여 받아 왔다. 당시 양에서는 ‘열반경’에 관한 연구가 집대성되고 있어서 ‘열반경집해’와 같은 책들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위덕왕대(554~598)에는 현광(玄光)이 남조 왕조인 진(陳)에서 남악혜사(514~577)로부터 ‘법화경’의 안락행 법문을 전수받고 귀국하여 웅진에서 실천적인 법화신앙을 널리 전하였다. 그 다음 법왕 원년(599) 12월에는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 종류를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이는 불교의 불살생계를 실시한 것으로 북제 황제들이 실시했던 불교정책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불교 가운데 계율 연구의 수준은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되어 특히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다음해(600) 1월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세우고 30인을 출가시켰다. 금강에 면한 왕흥사는 아들인 무왕 35년(634) 2월에 준공되었는데, 신라의 황룡사에 비견되는 국립대찰이었다. 특히 무왕대(600~641)에는 익산에 새로운 수도를 계획하면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륵사 창건의 연기설화에는 무왕이 부인 선화공주(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와 용화산으로 가다가 산 밑 못 속에서 미륵 3존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선화공주의 발원에 의하여 사찰을 지은 것이 미륵사라고 한다. 이 절터는 최근의 발굴 작업을 통해 3금당 3탑의 가람 배치를 확인함으로써 백제 미륵신앙의 일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미륵사지 석탑을 복원하기 위한 해체 발굴 과정에서 지난 2009년 1월19일 탑 1층에서 1400년 전의 사리병과 함께 금판 모양의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가 발견되어 미륵사 창건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세련된 사륙변려문의 문체로 된 금판 193자의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이 무왕의 왕후인 좌평 사탁적덕(沙?積德)의 딸임이 명기되어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 미륵사의 창건 주체와 선화공주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삼국유사’권2 무왕조에 수록된 선화공주 이야기는 설화 그 자체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역사적인 사실과는 구별해야 한다. 굳이 선화공주설화의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면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위기의식을 공유한 백제와 신라 사이에 433년 동맹이 맺어져 이후 100여년간 지속되었는데, 493년 백제 동성왕의 청혼에 응하여 신라의 최고 관등인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던 사실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무왕(600~641)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독점하고 성왕이 신라군에게 살해된 이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오고 있어서 두 나라 왕실 사이의 혼인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사탁(택)씨는 백제 8대성의 하나로서 특히 사비 천도 뒤에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귀족가문이었다. 1948년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도 의자왕 14년(654)에 사탁덕적과 같은 가문 출신으로 보이는 사택지덕이 말년에 금당과 보탑을 창건한 사실을 역시 사륙변려문의 세련된 문체로 전해주어 귀족불교가 융성했던 백제불교의 실상을 증언해 주고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25호 / 2018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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