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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법정 스님의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을 ‘오! 주여’로 알다니 불자 맞나?”

▲ 서울 길상사 극락전 전경. 길상사 제공

새해 첫달 들어 계속 법정(法頂) 스님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에 대해서 글을 쓸 일이 생겨서입니다. 새롭게 읽은 글도 많습니다만 예전에 읽은 글들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영혼의 모음’이나 ‘무소유’ 같은 초기 수필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다시 읽으니 그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법정스님 첫 수필 ‘영혼의 모음’
나무아미타불과 불교신앙 언급
‘나무아미타불’ 국민 귀에 익어
그러나 불자들 의미 잘 몰라

서방정토설 부정하지는 않지만
불타교설 따른 방편설로 규정
법정 스님, 나무아미타불 염송
타인과 함께 극락가려는 수행

그런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최초의 수필집이 ‘영혼의 모음’인데 그 중에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스님의 책들은 구해서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조금씩 다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이다. 국산영화 배우들을 비롯하여 시대소설(時代小說)을 다루는 문필업자며 지나가는 먹물 옷을 보면 “중중 까까중……”이라고 알은 체를 하는 골목대장들까지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국회 제삼별관(國會 第三別館)’ 보다는 범국민적으로 귀에 익은 말이다.”

1968년 9월27일 쓰신 글인데 그때만 해도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범국민적으로 귀에 익은 말’이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이 본래 의미와는 달리 엉뚱하게 인식되고 있거나 통용되는 것을 볼 때마다 씁쓸한 생각이 없지 않다. 마치 “오, 주여!”와 비슷한 의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불교신자 안에서조차 적지 않다.”

법정 스님의 글을 읽다보면 불교교단이나 불교신앙의 행태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하시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근본취지가 바로 ‘본래 의미’와 달라진 것을 ‘본래 의미’로 되돌리고자 해서입니다. 스님에게 개혁이나 유신은 바로 그런 ‘본래 의미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말의 본적지에 조회를 해보면 나무(南無)는 산스크리트어의 ‘Namo’ 또는 ‘Namas’에서 한자(漢字)로 음역한 말인데 돌아가 의지(歸依)한다는 뜻. 아미타불(阿彌陀佛)은 ‘Amitāyus, Amitābha’에서 온 말로 무량수불 무량광불(無量壽佛 無量光佛)을 뜻한다. 어떤 경전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멀리 십만억(十萬億) 국토를 지나서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주재하는 부처님으로 되어 있다. 그 세계에 가고 싶은 희망자는 나무아미타불을 지극하게 부르면 그곳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정토삼부경’의 요점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글 특유의 비판적 언급은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그러나 불타(佛陀)의 교설(敎說)이 어디까지나 청중의 수준에 따라 말해진 방편설(方便說)임을 고려할 때 정토(淨土)가 반드시 서쪽으로 그 많은 세계를 지나서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방편설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번뇌를 떠나서 해탈하고 고뇌를 떠나서 행복에 이르게 하는 방편을 설하는 것입니다. 다만 ‘청중의 수준’이 달라서 어떤 경전은 어떤 수준에 맞추어진 방편이고 또 다른 경전은 또 다른 수준에 맞추어진 방편입니다.

법정 스님은 지금 “나무아미타불”을 말하는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서 설해진, 저 같은 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서쪽에 있다고 하는 정토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정토가 반드시 서쪽에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역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나무아미타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서방(西方)은 동방(東方)에 대립된 서방이 아니라 아미타불이 계신 곳이 서방이라고 말입니다. 상대적인 서방이 아니라 절대적인 서방이므로 서방은 곧 정방(正方)이자 중방(中方)이 됩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은 지금 그런 절대적인 방향 속에서 정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이 청정하면 그 자리가 정토다.’ 이와 같은 직선적인 교설로 미루어 보면 불교의 초점은 내세(來世)에 있지 않고 분명히 현세(現世)에 있는 것이다.”

정토신앙은 참 좋은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킬레스 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세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지금 당장 이 현세를 살아가는 데 소홀한 것은 아니냐? 지금 당장의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 이런 문제제기가 가능합니다. 법정 스님께서도 지금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량수(無量壽), 영원한 생명이라는 이 말은 자비를 상징한 것이며 무한한 광명인 무량광(無量光)은 곧 지혜를 뜻한 말이다. 그 지혜와 자비는 먼데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의 심성(心性)에 갖추어진 것.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의 진정한 의미는 나 혼자만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 부르는 염불이 아니고 우리들 안에 있는 지혜와 자비를 끌어내는 일이다. 즉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려는 다짐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나 혼자만 극락에 가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다른 이웃들에게 널리 알려서(권진 勸進) 함께 극락에 가야 합니다. 지금 현세에서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다가 다 함께 극락가자는 것이 정토신앙의 본질입니다.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지금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건 아랑곳없이 초연하려는 종교인이 있다면, 그가 소속한 종교는 현장 밖에서 말라 죽게 될 것이다. 지혜와 자비가 모든 이웃을 위해 청정하게 베풀어지지 않고 나만의 이해관계로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무한한 광명도 영원한 생명도 될 수 없다. 이 시대의 불교도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만 외우고 몸소 행동하지 않을 때 골목 안 꼬마들한테서만이 아니고 수많은 민중들로부터 날아오는 돌팔매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상입니다. 우리는 법정 스님의 ‘나무아미타불’을 다 읽어보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하더라도, 무량수불 무량광불의 의미를 이 현세 안에서 지혜와 자비로 되살려내면서 “나무아미타불”을 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 글과 함께 ‘종점에서 조명을’이라는 글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혼의 모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종점’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생을 죽음 쪽에서 조명해 보자”는 이야기를 법정 스님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인식시켜주는 말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은 죽어서 내세에 만나는 부처님으로 말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토신앙의 의미가 내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세를 보다 더 충실히 살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을 거기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의 글에는 상대적으로 보아서 ‘정토삼부경’의 인용은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스님이 창건하신 도량 길상사(吉祥寺)의 법당은 극락전입니다. 왜 대웅전이 아니라 극락전이 되었을까요? 언제 법정 스님을 모신 스님이나, 그 무렵의 일을 잘 아시는 분을 만나면 한 번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25호 / 2018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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