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인월암 원순 스님
송광사 인월암 원순 스님
  • 정리=주영미 기자
  • 승인 2018.01.2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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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하는 마음 놓는 것이 일상생활 속 참선입니다”

▲ 원순 스님은 “시비분별을 내려놓아야 선의 종착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맑은소리 맑은나라’ 사진 제공

제가 서울에서 진행되는 한 법회에 초청받아 가면 꼭 찾아오는 거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책을 굉장히 많이 읽으십니다. 특히 ‘금강경’을 좋아하고 ‘육조단경’을 좋아해서 그 분야의 책은 전부 찾아서 읽으신다고 합니다. 그 분이 하루는 성철 큰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대해 물어 보셨습니다. 너무 한쪽에 치우친 주장이 아니냐는 비판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바가 있습니다.

돈오돈수는 결승점 완주한 자리
수행자는 한쪽만 집착하면 안돼
‘돈’은 단숨에 깨달으니 빠른 것
‘점’은 점차적으로 가니 더딘 것

부처님 마음은 무심, 무념, 무상
중생의 알음알이를 정화한 것이
바로 참마음이고 성불하는 자리

참선은 굉장히 쉬운 수행법인데
불자들은 굉장히 어렵다고 말해
힘들다 생각 놓으면 무상, 무념  


돈오돈수는 선의 종착지입니다. 참선을 해서 공부가 끝나는 그 자리를 강조해서 하는 말입니다. 곧, 백 미터 달리기 테이프를 끊는 자리, 결승점 완주를 하는 자리입니다. 선의 목적을 성취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수행자들이 그 자리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공부의 중간 지점에서 자꾸 완주했다, 목적지에 도달했다, 테이프를 끊었다 이런 저런 말들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 경계에 속지 말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돈오돈수만이 옳고 점수(漸修)는 틀렸다는 오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수행자는 한쪽 개념만 옳다고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념은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오돈수, 돈오점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쪽만 강조하는 것은 육조 스님의 뜻에도, 중도(中道)의 도리에도 어긋납니다. 육조단경에도 “돈교법(頓敎法)만 권할 뿐 다른 것은 권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차근차근 여러 가지 교리를 다양하고 자상하게 설명하면서도 항상 근본은 공부가 끝나는 자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남종(南宗), 북종(北宗)이라고 해서 남종을 돈오돈수법이라 하고 북종을 돈오점수법이라고 합니다. 신수 대사와 혜능 대사가 오조 홍인 대사의 상좌인데 이 두 분 중 남쪽으로 가신 분이 혜능 대사이고 북쪽에 터를 잡으신 분이 신수 대사입니다. 그런데 남종에 대하여 북종이 형성된 것만 보아도 신수 대사 역시 그 당시 큰 영향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육조 대사는 맨발에서 시작하다시피 했고 육조대사의 가르침은 임제 스님으로 이어져 큰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신수 대사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장이 바로 ‘육조단경’의 24장 ‘돈수’입니다. ‘돈수’는 단숨에 공부를 해 마친 것입니다. 중생이 아닌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는 관점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에서 보는 계, 정, 혜는 일정한 경계가 있어서 이것은 계, 이것은 정, 이것은 혜로 나누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는 계, 정, 혜는 그 근본이 하나로 시원하게 통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서울 법회에 법문을 들으러 오시는 거사님의 연세는 80세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잠을 자는 시간과 운동하는 시간 이외에는 전부 책을 보고 불교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 분은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 즐겁지만 단 한 가지, 불교공부가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그 말씀에 공감하시는 분들에게 꼭 당부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을 볼 때에도 한문 한 자 더 아는 것보다 근본 뜻으로 회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문을 보고 해석만 염두에 두면 복잡한 내용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특히 ‘금강경’ 같은 경전은 번역서가 많고 사적인 견해가 덧붙여져 내용이 매우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근본 뜻을 알고 회통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견처가 있어 스스로 뜻이 정리가 되면 글을 일관성 있게 읽게 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표현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이 부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육조단경’에서 강조하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돈오돈수의 근본을 알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길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근본을 모르고 공부를 한다면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의외로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외골수로 자기 공부만 하시는 분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지혜롭게 선지식을 찾아 공부하는 것도 참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돈’은 단숨에 깨닫는 것, ‘점’은 점차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돈은 단숨에 깨달으니 빠른 것이고 점은 점차적으로 가니 더딘 것뿐입니다. 24장에서는 지성 스님이라는 신수 대사의 제자가 등장합니다. 신수 대사가 혜능 스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제자를 보냈다고 나와 있습니다. 지성 스님에게 혜능 대사는 마음에 그릇됨이 없음이 계라고 일러 주십니다. 또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선정이고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지혜라고 하십니다. 육조 스님이 보는 계, 정, 혜는 모두 부처님 마음자리에서 보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지성 스님에 따르면, 신수 대사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계이며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지혜이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정”이라고 합니다. 즉, 육조 대사의 계, 정, 혜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신수 대사의 계, 정, 혜는 중생의 마음자리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경전을 설법한 시기로 분류할 때 화엄, 아함, 방등, 반야, 법화, 열반으로 나눕니다. 화엄은 깨닫고 보니 부처님 세상이라는 것을 마음껏 이야기하는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법을 즐기시다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니 제석천이 하늘에서 내려와 대자대비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해 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자 방편으로 쓰신 첫 가르침이 ‘아함경’입니다. 아함을 어느 정도 공부한 후 이렇게 저렇게 하면 모범 학생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 ‘방등경’입니다. 공부가 더 무르익으려면 창의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창의력이란 기존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이 공(空) 사상을 설파하는 ‘반야경’입니다. 그리고 공 사상을 통해 부처님의 세상을 드러내는 것이 법화, 열반입니다. 아함, 방등의 과정은 신수 대사의 가르침과 부합하고 ‘금강경’ ‘법화경’에서처럼 어떤 모습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것은 진실한 삶에 부합하지 않으니 고정 관념을 철저하게 깨고 있는 것이 육조 스님의 가르침입니다.

칠불통계(七佛通戒)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오늘도 나의 허물 되돌아보며
맑고도 향기로운 삶을 받들어
하늘빛 푸른 소원 참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꽃피우소서.

이것은 계, 정, 혜를 제 나름대로 풀이한 것입니다. 나의 허물을 되돌아본다면 나쁜 일은 하지 않으려 하겠지요. 이것은 ‘계’가 됩니다. 맑고도 향기로운 삶을 받든다는 것은 온갖 좋은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므로 ‘지혜’가 됩니다. 그리고 하늘빛 푸른 소원 참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자정기의에서 ‘기의’는 중생의 알음알이입니다. 스스로 중생의 알음알이를 정화한 것이 참마음이고 그 마음이 성불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꽃 핀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음 ‘선정’입니다.

부처님 마음은 무심(無心), 무념(無念), 무상(無相)이라고도 합니다. 시비 분별이 없는 마음이 무심인데, 이 마음은 망념이 없기 때문에 무념이라 하고, 이 마음자리는 집착할 어떤 모습도 없으므로 무상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 마음이 빛나면 인연이 주어지는 대로 드러나는 모습이 부처님의 반듯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므로 ‘계’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 계를 드러내는 근본 마음자리가 ‘선정’이며, 이런 모습으로 주어진 인연대로 걸림 없이 슬기롭게 살아가는 삶이 ‘지혜(智慧)’입니다. 부처님 마음자리에서 보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는 결국 그 바탕이 하나입니다. 일체 망념이 떨어진 그 마음자리에서 빛으로 반듯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계율이고 그 모습은 맑고 깨끗한 부처님 마음자리 선정에서 나오며, 이 모습이 인연 따라 걸림 없이 슬기롭게 살아가는 삶을 지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처님을 어떤 입장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계율도 되고 선정도 되며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참선은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참선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는 그 생각 자체를 놓아버리면 그 자리가 참선하는 자리가 되어 무념, 무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선이 힘들다는 그 생각 자체가 망념이 되어 참선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순환논법처럼 들리겠지만 정작 참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참선이 힘들다는 바로 그 생각입니다. 

참선이란 다만 할 일을 열심히 할 뿐 다른 생각이 없이 주어진 일을 그대로 받아들여 행복하게 죽 이어가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날짜에 시간을 맞춰 이 자리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될 때, 오직 공부에 집중할 뿐, 이 자리에서 공부하는 이외의 다른 생각들은 모두 망념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망념이 없이 주어진 일, 공부면 공부, 운전이면 운전, 거기에 집중하는 것, 다시 말해 주어진 일에 집중하되 마음이 다른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유혹받지 않는 마음이 선정이요, 이 마음이 죽 이어져 가는 것이 정진입니다.

참선이라고 하면 보통 선방에 가서 두툼한 좌복을 깔고 앉아 있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초보자들을 처음 가르칠 때 쓰는 방법입니다. 공부가 무르익은 사람은 참선 이야기를 할 때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봅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요동쳐 다른 생각들이 많으면 이것은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참선이란 아주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비하는 마음만 놓아 버리면 됩니다. 시비가 일어날 때 분별하는 그 마음을 돌이켜 보십시오. 돌이켜 보는 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곧 시비분별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마음공부 아닐까요? 그 마음공부의 근본을 가지고 가르침을 주고 있는 법문이 바로 ‘육조단경’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1월22일 부산 묘광선원에서 열린 ‘부산 열린불교아카데미 ? 육조단경 강좌’ 10번째 강의에서 원순 스님의 강설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1426호 / 2018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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