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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천지창조와 항마성도

기자명 주수완

불교와 기독교가 첫발 내딛는 극적인 순간을 경이롭게 표현

▲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1508~1511년. 로마 바티칸 시스틴 체플.

그것은 베르누이의 정리였다. 물이나 공기가 좁은 곳을 지날 때는 압력이 높고 빠르게 흐르지만, 넓은 곳을 지날 때는 압력이 낮고 느리게 흐르는 현상. 수많은 인파에 떠밀리듯이 바티칸 박물관의 전시들을 둘러보며 라파엘의 벽화가 그려진 방들을 지나 좁은 통로를 통해 이동하다보니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자신이 넓은 공간에 휑하니 분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면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볼트 구조물로 입체감 살려

하나님도 매달려 있는 구조
중력 느낌 강렬한 입체감

초월과 인간의 접점을 찾아
오히려 초월성 더욱 극대화

석굴암 본존의 깨달음 순간
정적이면서도 가장 역동적

땅신 불러내려 살짝 든 검지
숨결 넣는 하나님 손과 상통

주변 사람들도 마치 분무기로 뿌려진 유체입자처럼 천천히, 아니 아예 멈춰서 다들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시스틴 체플(Sistine Chapel)이다. 순간 느낀 감정은 아찔한 현기증이었다.

천정에 그려진 인물들이 어찌나 사실적이고 입체적인지 아래서 올려다보고 있자니 내 머리 위로 떨어질 것만 같다. 다른 성당의 천정에 그려진 천사나 성인들은 전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늘로 날아가는 듯해 내 머리 위로 떨어질 것 같은 그런 바보 같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천지창조는 달랐다. 그동안 결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것 같지 않은 존재들의 그림만 보다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서야 비로소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 속의 인물들은, 아니 심지어 신조차 결코 중력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어쩌면 중력을 거스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이 신화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싶었다.

▲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본실 내부. 7세기 중반.

나는 그 현기증을 마음껏 즐겼다. 우리는 놀이공원에 가서 청룡열차나 바이킹을 타며 기꺼이 현기증을 즐긴다. 내겐 그 어떤 놀이기구보다 시스틴의 천지창조가 훨씬 아찔했고, 기꺼이 미켈란젤로가 운전하는 그 천지창조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3D 상영관이라고나 할까.

언뜻 미켈란젤로가 천정의 건축 구조를 무시하고 마치 유리천정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실제 많은 천정 벽화들은 천정이 건축구조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고 대신 그것을 하나의 공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런 얄팍한 수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대놓고 이것이 건축구조임을 밝혔다. 실상은 평면 공간임에도 중간 중간에 볼트 구조물이 있는 것처럼 그려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입체적으로 그려서 실제 튀어나온 구조물처럼 보인다.

미켈란젤로가 천정임을 숨기지 않은 것도 실은 벽화 속 등장인물들이 천정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기 위한 극적인 장치로 생각된다. 오히려 하늘에 떠있는 것처럼 표현하면 그 높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높이는 12m여서 그 이상 높거나 혹은 너무 낮아도 높이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것과 같다.

▲ 미켈란젤로 ‘천지창조’의 세부. 마치 실제 기둥인 것처럼 그려진 곳 위에 인물들이 매달려있는 듯 아슬아슬하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막연히 높은 하늘이 아니라, 마치 등장인물들이 천정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것도 살짝 튀어나온 기둥머리 부분에 간신히 앉아있거나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천정을 더욱 아찔한 높이로 만들어버렸다. 어떤 인물은 마치 천정의 튀어나온 부분을 붙잡고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인물은 금방이라도 우리 머리 위로 뛰어내릴 것만 같다.

심지어는 아담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조차 주변의 여러 시종들이 붙잡고 있어서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미켈란젤로는 신의 능력을 평가 절하했던 것일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마음껏 초인적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다른 작품들의 신화적 인물들보다도 여기의 인물들이 더 위대하게 보인다. 아마도 너무나 초월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인물들보다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 지녔기에 그 초월성이 보다 극대화된 것이 아닐까 싶다.

미켈란젤로는 그야말로 신성과 인격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매달려 있는 것 같은데 태연하고, 강력한 중력이 느껴지는데 떠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월적인 능력을 더욱 절실하게 실감하게 된다. 마치 영화 속 슈퍼맨은 아무리 잘 날아도 실감이 가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인간적인 서커스를 보면 잠시 공중제비를 도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과 같다. 천지창조 속의 여호와 하나님도 그 강력한 중력을 거슬러 하늘에 떠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 어떤 하나님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 조르지오 바자리가 그린 피렌체 두오모 성당 돔 내부의 천정벽화 ‘최후의 심판’. 중력이 없이 인물들이 실제 하늘에 떠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느새 1780년 청나라 북경에 있었던 성당인 천주당에 들어가 처음으로 서양화를 보았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이 되어 있었다. 그도 역시 천정에 그려진 입체적인 그림을 보고는 이렇게 기록했다. “천정을 바라다본즉 수없는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살결은 만지면 따뜻할 듯하고, 팔목이나 종아리는 포동포동 살이 쪘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 당황하여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아마 서양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박지원은 웬만한 서양화만으로도 이렇게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런 그림을 결코 칭송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내가 뭔가 보려고 하면 그들이 먼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싫었고, 뭔가 들어보고 싶었는데 먼저 내 귀에 속삭여 부끄러웠으며,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먼저 우렛소리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칭찬 대신 다만 ‘기괴하다’고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박지원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았더라면 그 감식안으로 이렇게 읊었을 것이다. “다른 화가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지만 이 화가는 그 신을 불러내려고 한 것 같았다.”

▲ 석굴암 본존 석가모니 부처님의 항마촉지인에 표현된 오른손 검지가 살짝 들려있어 촉지의 순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천지창조를 보고 느낀 아찔함은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사실 그 충격은 필자에게 익숙한 경험이기도 했다. 청룡열차는 탈 때마다 짜릿하지만 맨 처음 탈 때 아마 가장 무서웠으리라. 나의 첫 청룡열차는 석굴암이었다. 석굴암은 팔부중과 금강역사가 늘어선 전실에서 비록 짧기는 하지만 사천왕이 새겨진 약간 좁은 통로를 지나 본실로 들어가게 된다. 이 통로에서 전실로 들어서는 순간 텅 빈 둥그런 돔 천정을 만나며 일종의 베르누이의 정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돔이 시작되는 높이에는 보살상을 봉안한 감실들이 열 지어 늘어서 있다.

그런데 석굴암의 본존 부처님이 절대적인 고요의 경지에 들어가 계신데 반해 이를 둘러싼 공간은 매우 역동적으로 다가온다. 부처님 주변으로 에워싸듯이 걸어 나오는 십대제자들, 그리고 그 위로 마치 공중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보살들. 아마 석굴암의 석공들도 이들 감실 속의 보살들을 날아다니는 천인, 즉 비천처럼 표현하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감실이라는 건축 공간을 만들어서 그 안에 앉아있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이 보살들은 마치 이제 막 깨달음을 얻는 석가모니의 지상 최대의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관객들처럼 보인다. 물론 조용한 관객들은 아니다.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를 관람하는 아주 열렬한 관객들이다. 이 보살들은 시스틴 천정벽화의 기둥머리 위에 매달리듯이 앉아 천지창조의 순간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는 인물들과 대칭을 이룬다.

▲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숨결을 불어넣는 장면을 손가락을 맞댄 것으로 표현한 것은 순전히 미켈란젤로의 아이디어였다.

천지창조와 항마성도, 그야말로 기독교와 불교가 첫발을 내딛는 극적인 순간이다. 그런데 이 경이로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천지창조는 아무래도 오른손 검지를 내밀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표현이 전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석굴암은 이제 막 깨달음을 얻은 본존 부처님이 중심인데, 이렇게 정적인 상이 동적인 상들의 원천이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석굴암 부처님에게도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담겨있다. 바로 지신(地神)을 불러내기 위해 땅을 가리키시려고 살짝 치켜든 오른손 검지의 움직임이다. 그 미세한 움직임이 파동을 일으키고 그 파문이 벽면에 닿을 즈음에는 거대한 에너지로 증폭되어 단단한 화강암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어떻게 두 종교의 첫 걸음을 알리는 장면을 묘사한 동서양의 두 거장이 이렇게 오른손 검지에서 생명이 뿜어져 나오게 한다는 공통된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던 것일까. 강력한 중력을 거스르고 떠있는 신화적 존재들을 묘사한 ‘천지창조’, 그리고 석굴 안에 석가모니의 성도를 찬탄하는 우주적 소리를 적막함이라는 역설로 가득 담아낸 석굴암. 그 전설이 오른손 검지에서 시작되는 사이, 누가 감히 이 두 걸작의 위대함을 저울에 달려고 한단 말인가!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26호 / 2018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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