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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묘호인(妙好人)과 묘코닌(妙好人)

“법정 스님, 적게 알면서도 많이 행해야 묘호인”

▲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법정 스님. 법보신문 자료사진

지난 편지에서는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신 “나무아미타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처 다 말씀드리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스님께서 ‘묘호인’에 대해서 언급하신 바 있다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 법문집서 묘호인 정의
“밝은 표정과 함께 따뜻한 말씨로
친절하게 대하는 게 묘호인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아는 사람”

당 선도대사 최초로 묘호인 정의
“염불만 하면 누구라도 묘호인”
법정 스님 묘호인과는 개념 달라

일본서 묘호인을 묘코닌으로 불러
신란 스님 가르침으로 정토진종서
“이웃 위해 헌신적 노력하는 사람”

“단순한 학문이나 맹목적 수행으로는 종교적 현실을 움직일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묘호인(妙好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적 이론은 전혀 모르지만 마음이 지극한 신앙인으로, 어떻게 하든지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노력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묘호’는 흰 연꽃에서 나온 말로, 연꽃처럼 늘 맑고 향기롭게 둘레를 비추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법정 스님 법문집2,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문학의 숲) 234쪽에 나옵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맥락에서 이 묘호인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이 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문단을 하나 더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적게 알면서도 많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진정 아는 사람입니다. 자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은 지극히 추상적인 용어입니다. 우리는 만나는 대상에게 한결 같이 친절해야 합니다. 밝은 표정과 따뜻한 말씨로써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이것이 모든 신앙인의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앎 보다는 행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앎이 적더라도 얼마든지 사랑과 자비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신앙인들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의 강령(綱領)의 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령이 제시되고 나면 그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편합니다. 그런 구체적인 실례로서, 법정 스님은 ‘묘호인’이라는 사람들의 존재를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맙니다. 이 ‘묘호인’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책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그 역할을 제가 좀 하고자 합니다.

‘묘호인’은 당나라 때 정토신앙을 크게 일으킨 선도(善導) 대사가 최초로 하신 말씀입니다. 선도대사는 ‘관무량수경’에 대한 주석서를 씁니다. ‘관무량수경소’입니다. 모두 4권인데, 제4권을 흔히 ‘관경소 산선의’라고 합니다. 산선(散善)의 의미를 밝히는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산선은, 지난 번에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제14-16관을 가리킵니다. 

산선이라 평가받는 제16관에서는 구품(九品) 왕생을 말하는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 즉 하품하생(下品下生)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주석하면서 선도 대사는 묘호인이라는 말을 조어(造語)합니다.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호인(好人)이고 묘호인이며 상상인(上上人)이며 희유인(希有人)이고 최승인(最勝人)이다.”

이 ‘소’의 말씀은 그 전에 ‘경’의 어떤 말씀을 주석하는 것일까요? 그 말씀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염불하는 자가 있다면(若念佛者), 마땅히 알아야 한다(當知). 이 사람은 사람들 중에서 연꽃이다(此人 是人中芬陀利華).”

한문으로 ‘분타리화’라고 한 것은 범어로는 ‘pundarika’라고 합니다. 연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관무량수경’에서는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들 중에서는 연꽃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을 선도대사는 다시 다섯 가지 말을 만들어서 상찬(賞讚)한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고, 아주 좋은 사람이고,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이고, 아주 드문 사람이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불교인들도 더러 ‘관무량수경’은 읽었지만, 선도대사의 ‘관무량수경’을 얼마나 어떻게 읽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저 자신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불교문헌 안에서 이 ‘묘호인’이라는 말을 썼다는 기록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법정 스님의 이 글에서 그 용례를 만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정 스님은 이 ‘묘호인’이라는 말을 어디서 만나게 된 것일까요? 선도 대사의 ‘관무량수경소’ 제4권을 읽었던 것일까요? 그렇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정 스님이 지금 인용한 ‘묘호인’의 정의를 살펴보면, 선도대사의 ‘관무량수경소’에 나오는 정의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도 대사의 묘호인 정의는 “염불하는 사람”입니다. 염불만 하면 다 묘호인입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의 정의에 동원되는 내용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현실적이고 행동주의적입니다. “종교적 이론은 전혀 모르지만 마음이 지극한 신앙인으로, 어떻게 하든지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노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정의는 일본의 ‘묘코닌’에서 온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묘호인’을 ‘묘코닌’으로 부릅니다. 일본어로 읽으면 그렇게 발음됩니다. 그럼 일본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묘코닌’으로 불러왔을까요? 모든 염불하는 사람을 다 ‘묘코닌’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시대적으로는 에도시대(임진왜란 이후 성립)에, 종파적으로는 신란(親鸞)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정토진종(淨土眞宗)에서, 신분적으로는 스님이 아닌 재가자 사이에 출현합니다.

법정 스님의 정의에도 나오는 것처럼, 이 분들은 대개 일자무식이 많습니다. 그 시절 농촌에서 살아가던 농민이나 농민의 아내나 이런 사람들 중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정토진종의 사원에 다니면서 스님들로부터 법문을 많이 듣고서, “아, 그렇구나. 나는 죽으면 아미타불의 극락에 갈 수 있겠구나.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그러니 이 세상에서는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야 하겠구나.”

이렇게 되어서 법정 스님이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든 이웃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꼴(소가 먹는 풀)을 대신 베다 주고, 아픈 사람에게는 뜸도 떠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하도 신심의 세계가 깊다 보니, 무식해도 명언(名言)이 나오고 명시(名詩)가 나옵니다. 그렇게 살다가 극락으로 왕생하게 되면, 그분들이 다니던 절의 주지스님이 아무개 묘코닌의 전기를 정리해 놓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묘코닌들의 전기를 제일 먼저 연구한 분이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입니다. 야나기의 책 ‘나무아미타불’에서는 이 묘코닌에 대해서 극찬을 하고, 그들의 명언을 더러더러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묘호인과 묘코닌의 개념이 다소 다릅니다. 앞의 편지에서 말씀드린 바, 법정 스님이 걱정하는 것처럼 “나무아미타불” 신앙에는 문제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세를 잊고, 이웃을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잘 극복한 사례를 우리는 바로 이 ‘묘코닌’들의 삶과 신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염불만 하는 ‘묘호인’이 아니라, 염불을 하면서도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묘코닌’으로 살아보는 것 말입니다. 특히 저와 같은 재가자라면, 더욱더 ‘화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이제 인생의 숙제(버킷 리스트)는 묘코닌이 되어 보는 것뿐이라 노래한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26호 / 2018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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