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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김부자 배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고 있지만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 공존이 한 발 한 발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마식령 합동훈련에 관한 뉴스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훈련하는 남북한 선수들이 각각 태극기와 김부자 배지를 자제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배려를 하였다는 사실도 의외였다. 정말 불교적 진리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참신한 사건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태극기는 남한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김부자 배지는 북한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다양한 차원에서 일정한 정체성이 마땅히 필요하다. 우리의 국가적 정체성 차원에서 보자면, 한반도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다른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이다. 북한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남한을 일종의 미국 식민지 체제로 바라보고, 남한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북한을 비정상적인 독재 체제로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남한과 북한은 모두 엄연히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각각의 국가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우리의 국가적 정체성이 과연 절대적 중요성을 지녀야 하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물론 남한은 서구의 개인주의적 사조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어서 이러한 정체성 문제에 더 개방적일 수 있다. 특히 수십 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시민의 힘으로 종식시킨 남한에서는 국가가 국민 개개인보다 앞선다는 집단적 사고는 이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지 오래이다. 평창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 구성과 관련된 논란도 일부 젊은 세대들이 단일팀 구성을 국가 우선적인 사고라고 간주하면서 빚어진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차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들 각자는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기도 하고, 어떤 조직이나 회사의 구성원이기도 하고, 어떤 동호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들 각자는 각각의 직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도 하고, 다양한 취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도 하며, 종교 생활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도 한다.

다만 오늘날 남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정체성보다는 스스로 찾아가는 정체성에 더 의미를 둔다. 그러면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루어가는 정체성이 위협받는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마땅한 태도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불교에서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여기는 무아(無我) 사상도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키는 데 초점이 있다기보다는, ‘나’의 정체성이 고정된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개방적인 태도에 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어떤 집단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심지어 우리가 평생을 통해 이루어가는 정체성도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가변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한에 비하면 북한은 훨씬 더 견고하고 경직된 국가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편이 바람직한지를 절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만 진리나 가치의 다원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대 지구촌 사회의 현실을 전폭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남한에서는 보다 유연한 태도를 갖추기가 더 용이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입장에서 바라볼 때, 남한 선수들이 태극기 배지 착용을 자제한 것은 비교적 납득하기가 쉽다고 할 수 있다. 곧, 북한 선수들이 김부자 배지 착용을 자제한 것이 훨씬 더 파격적인 태도 변화라고 하겠다. 자신의 정체성을 불변하는 실체로 고집하지 않는 이러한 유연함에서 앞으로 남북한 관계의 전망을 밝게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이 아니기를 바란다.

류제동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초빙교수 tvam@naver.com
 


[1427호 / 2018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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