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고대불교-불교의 전래와 수용-③ 신라(상)
23. 고대불교-불교의 전래와 수용-③ 신라(상)
  • 최병헌 교수
  • 승인 2018.02.0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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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중 불교 수용 가장 늦었지만 순교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공인

▲ 고구려 불교가 소백산을 넘어 신라의 변방에 곧바로 전해졌던 사실을 증언하는 영주 순흥 고분 벽화. 출처=문화재청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불교 수용이 가장 늦은 나라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전진(前秦)에서 순도가 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으며, 백제는 그보다 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가 와서 불교를 전하였다. 이 두 나라에서는 중국의 왕조들과 그전부터 교류하면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특히 우호 관계에 있는 전진과 동진으로부터 각기 국가적인 사절을 매개로 하여 불교가 전래되어 왔기 때문에 이렇다 할 알력을 빚어냄이 없이 왕실에 의해 순탄하게 받아들여졌다.

국왕과 귀족 치열한 논쟁 끝
왕 측근 이차돈 순교로 수용

중국에 국가 사절 파견하며
불교 접했지만 전래 안 돼

적대 관계였던 고구려 통해
지방에서 전도 및 박해 겪어

불교의 국가 공인 배경에는
양 사신 승려 원표 역할 커

정방·멸구자 순교자 기록은
다수 무명 승려들 전도 흔적

선산의 모례·영주의 여숙지
지방서 불교 수용한 선구자

아도와 법흥왕, 이차돈은
신라 흥법의 성인 추앙받아


그러나 신라의 불교전래는 중국의 왕조들과 직접 교류하지 못하였고, 120여년간 적대관계에 있었던 고구려를 통하여 지방에서의 개인적인 전도와 박해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공인이 훨씬 늦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근본적인 원인은 신라의 국가체제 정비와 왕권 강화라는 국가발전이 뒤늦음으로써 불교를 수용할 수 있는 주체세력이 아직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에서도 일찍 국가적인 사절을 통해 불교를 접할 기회는 없지 않았다. 신라는 내물마립간(356〜402) 때 낙동강 동쪽의 경상북도 일대를 지배하는 상당히 큰 연맹왕국을 형성하게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내물마립간 26년(381) 처음으로 중국 왕조와 직접적인 교류를 추진하였는데, 전진과 친선관계를 이루고 있었던 고구려의 사신에 딸려 위두(衛頭)를 사신으로 보내었다. 그때 호불왕으로 유명한 전진왕 부견(苻堅)과 나눈 대화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부견이 “그대의 말에 해동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질문하니, 위두는 “이는 마치 중국에서 시대가 변하고 명호가 바뀐 것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옛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 전진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으며, 얼마 안 되어 고구려와도 적대관계로 바뀜으로써 공적인 불교전래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신라가 중국의 왕조들과 직접 교류하게 되는 것은 140여년이나 지난 법흥왕 8년(521) 백제 사신에 딸려 양(梁)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보살황제로 칭해지던 양무제는 사신으로 승려 원표(元表)를 보내왔는데, 이로 말미암아 신라 왕실에서 비로소 불교의 수용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왕과 귀족세력 사이의 치열한 논쟁 끝에 법흥왕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겪고서야 비로소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구려로부터 개인적인 전도는 늦어도 눌지마립간(417〜458) 때부터 100여 년간 단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이러한 사실은 설화적인 자료형태로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불교전래 설화를 자료별로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권4 법흥왕15년조에 인용된 김대문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서는 신라의 불교전래과정이 3단계로 서술되어 있다. 제1단계는 19대 눌지마립간(417〜458) 때에 사문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선산)에 이르러 군인 모례(毛禮)의 집안 굴속에 숨어 살다가 양의 사신이 가져온 향의 이름과 용도를 밝혀주었으며, 또 왕녀의 병을 고쳐 주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한다. 다음 제2단계는 비처마립간(소지마립간, 479〜500) 때에 아도(阿道)화상이 시자 3인과 같이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용모가 묵호자와 흡사했으며, 여러 해를 머물다가 병 없이 죽고 그의 시자들이 남아서 경률을 강독하여 신봉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 제3단계는 법흥왕 14년(527) 군신(귀족)들의 반대로 이차돈이 순교당할 때 흰 피가 용솟음치는 이적을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한다. 불교전래 설화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며, 신뢰성이 가장 높은 자료이다.

‘삼국유사’권3 아도기라조에 인용된 김용행 찬술의 ‘아도화상비(阿道和尙碑)’(‘해동고승전’권1에서는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서 재인용)에서는 ‘계림잡전’보다 진화된 형태의 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고구려 승려 아도가 13대 미추니사금 2년(263) 신라에 와서 불법을 펴고자 하였을 때 계림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속림(續林, 一善縣) 모록(毛祿, 모례)의 집에 숨어 있었다. 여기에 은신하기 3년,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하여 천경림에 절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것이 흥륜사(興輪寺)라는 것이다. 이 설화 내용 가운데서 미추니사금 2년의 전래설은 믿기 어려우나, 주목되는 것은 역시 일선 지방의 모례가 등장하는 점이다.

‘해동고승전’권1 아도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서는 양(梁) 대통 원년(법흥왕14년, 527) 3월11일에 아도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왔을 때, 그를 본 모례가 놀라, “전에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坵玼)가 왔다가 죽임을 당했다”면서 아도를 숨겨주었으며, 오(吳)의 사신이 가져온 향의 용도를 알아보았고, 또한 아도가 외국 사신의 예배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불법의 신행을 허락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도에 앞서 고구려에서 온 2인의 순교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해동고승전’권1에 인용된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서는 양에서 원표(元表)를 사신으로 보내어 침단(沈檀)과 함께 불경·불상을 보내왔는데, 아도가 그 사용법을 알려주었으며, 아도는 두 번이나 참해를 당할 뻔했으나, 신통력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모례의 집에 숨었다고 한다. 양의 승려 원표가 사신으로 왔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는 신라시대 조성된 금석문 자료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원래 경주시 소금강산 백률사 사지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국유사’권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 인용되어 있는 일념(一念) 찬술의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에 의하면, 결사 당시에 무덤을 수축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비석이 바로 이 석당기로 보이며, 세운 시기는 헌덕왕 10년(818)이다.(‘삼국유사’의 인용자료에는 817년으로 되어 있음) 이 비석의 내용은 이차돈의 순교 사실을 전하는 것인데, 신라의 불교 공인에 관한 1차 자료로서 주목된다. 이차돈의 목이 잘려 흰 피가 솟아올랐다고 하는 설화는 ‘현우경(賢愚經)’과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 등 여러 경전에 설해져오는 순교설화의 한 유형이다.

이상 불교의 전래와 공인에 관한 설화들을 정리하여 보면, 우선 최초의 불교 전래 시기가 김씨족 출신의 최초 왕인 미추니사금 때였다는 전설은 사실성이 극히 희박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지눌마립간 때부터 고구려로부터 개인적인 전도를 통해서 불교가 단속적으로 전래되어 왔으나, 국가적인 공인은 양의 승려 원표가 사신으로 온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차돈이 순교되기 이전 100여년간 고구려로부터 여러 사람들의 개인적인 전도와 박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전도승으로 묵호자와 함께 여러 번 등장하는 아도는 ‘삼국유사’권2 아도기라조에서 처음 신라에서 승명을 몰랐으므로 “아두삼마(阿頭彡麽)”라고 하였다는 언급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특정 승려의 이름이 아니고, 외형을 보고 불려진 것으로 보이며, ‘고기’에서 순교자로 명기한 정방과 멸구자 2인이 구체적인 이름이었던 것으로 본다. 이로써 신라의 초기 불교전래는 100여년간 고구려로부터 넘어오는 다수의 무명의 승려들에 의해 지방에서의 개인적 전도와 박해 속에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의 승려 원표가 신라에 사신으로 옴으로써 비로소 불교 수용의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었고, 왕의 최측근인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하여 마침내 공인에 이른 것으로 본다.

다음에 일선 지방의 모례가 여러 설화에서 불교 수용의 주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불교의 전래 경로와 수용 주체를 말해주는 사실로서 주목된다. 신라는 경상북도 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소백산맥을 넘는 교통로를 개척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찍이 아달라니사금 3년(156)에 계립령(雞立嶺, 鳥嶺), 2년 뒤에 죽령(竹嶺)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이 두 고갯길은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중부지역으로 진출하는 교통로상의 관문이었다. 충북지역에서 계립령을 넘으면 문경-상주-선산-대구-경주로 연결되며, 강원도지역에서 죽령을 넘으면 영주-안동-영천-경주로 연결된다. 특히 소지마립간(479~500) 때에는 사방에 우역(郵驛)을 두고 도로를 수리하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왕 자신이 일선(선산)지역에 직접 순행한 바 있으며, 말년에는 영주 지방에도 순행하면서 안동 지역의 여인에게 수차 미행한 일이 있었다. 1971년과 1985년 경북 순흥지역에서는 연꽃문양의 벽화고분과 ‘어숙지술간(於宿知述干)’의 묵서명의 고분이 각각 발견되었는데, 그 조성연대가 법흥왕 26년(539)과 진평왕 17년(595)으로 각각 추정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고구려로부터 선진문화가 전래되어 오는 통로인 점을 고려할 때 한 갑자를 올려잡아 소지왕 원년(479)과 법흥왕 22년(535)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특히 연꽃 문양의 양식이 고구려 후기 벽화고분의 연꽃 양식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이라는 점은 고구려 불교가 소백산맥의 죽령을 넘어 곧바로 전해졌던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또한 ‘술간(述干)’이라는 외위(外位) 제2관등을 가졌던 어숙지는 그 지방의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로써 선산지역의 지방세력가인 모례와 마찬가지로 영주지역의 어숙지 같은 인물들이 고구려 지역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개인적으로 전래되어 오는 불교를 남 먼저 받아들인 선구자들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불교 공인의 제일의 주역은 역시 국왕인 법흥왕과 국왕 측근의 관리로서 법흥왕의 당질(堂姪)이 되는 이차돈이었음은 물론이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고 최초 건립된 사찰의 이름이 ‘대왕사(大王寺)’, 또는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로 불렸던 사실은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와 함께 법흥왕과 이차돈이 신라의 흥법(興法)의 세 성인으로 길이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27호 / 2018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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