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만해 스님의 삶이 영화로 제작된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불교개혁가, 항일독립 투사, 그리고 문학가로서 보여 준 만해 스님의 일생은 그 자체가 곧 불교 혁신이었고 한국의 역사였으며 문학의 정수였다. 영화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감독과 작가를 비롯한 영화제작 스텝들이 이미 만해 스님을 연구해 나름의 구상을 마쳤겠으나 한 가지 당부하고자 한다. 만해 스님의 수행력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1905년 27살의 나이로 출가한 만해 스님은 1944년 세납 66세에 입적에 들었다. 40여년의 출가 기간 중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은 세납 39세의 1917년 2월3일 밤 10시다. 그 때 만해 스님은 설악산 오세암에서 정진 중이었다. 좌선 중 바람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에 대오했는데 그 때의 일대사를 방증하는 오도시가 남아 있다. 그 이후의 만해 스님 발길은 거침이 없었다.
1918년 잡지 ‘유심’ 창간을 준비했고 그 해 9월 창간호를 내놓았다. 비록 3호를 내고 종간됐으나 ‘유심’이 갖는 의미는 깊고도 깊다. 대중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항일독립 정신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고명수 선생은 이를 두고 ‘선사 만해가 지사로 전환하는 순간’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1919년 만해 스님은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 종교계 주축으로 추진된 3.1운동을 이끌었고, 그 해 7월에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통해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출감하며 세상에 던졌던 “고통이 곧 쾌락”이었다는 일언은 오늘에도 회자되고 있다. 강은애 선생은 이를 두고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감방이 바로 선방이었던 것이다. 생사를 초탈한 진정한 종교인의 수행력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일갈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나 명예에 단 한 번이라도 흔들린 적 없었던 만해 스님에 대해 김흥규 선생은 ‘시인인가 혁명가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의미 깊은 메시지를 전했다. “개인의 해탈과 사회적 해방을 동시에 추구했다. 개인의 내면적 자각을 노력함과 동시에 그 깨달음을 사회적 차원으로 전개시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려 했다.”
불교개혁가, 항일 투사, 문학가로서의 삶은 오세암 오도를 기점으로 증폭됐음을 영화 제작 스텝들이 주목해 주기 바란다.
[1428호 / 2018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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