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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대광명사 주지 목종 스님

“하심은 완벽한 비움의 세계 가동할 중심 축입니다”

▲ 대광명사 주지 목종 스님은 ‘버리기’를 실천하면 비움의 진면목을 터득할 것이라 했다. 사진 대광명사 제공

‘퍽! ’

새벽녘, 자전거와 택시가 부딪치는 소리는 짧지만 강렬했다. 자전거에 싣고 있던 우유팩과 함께 청년은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운전사가 급히 달려 와 “괜찮냐?”며 말을 걸어 왔다. 별다른 부상은 없어 보여 툭툭 털고 일어나 “괜찮으니 그냥 가시라” 했다. 흩어진 우유팩들을 주워 담고는 페달을 밟아보려는 데 아득히 먼 바다에서 인 어지러움이 이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을 연 여명이 칠흑 속으로 떨어져간다고 느껴지는 순간 눈앞에 보였던 사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연극 무대의 커튼이 닫히듯 세상도 그렇게 닫혀 가는 듯했다.

학비 벌려 나선 우유배달
택시와 충돌 후 의식혼미

범어사 청련암 3개월 체험
양익 스님 은사로 출가 결단

죽음 직전에 든 ‘난 누구인가?’
태백산 삼성암 정진서도 이어

‘행복’ 결정은 상대 아닌 ‘나’
무소유 이전에 ‘버리고 버려라’

‘건물이 왜 사라지지? 나도 사라지나? 난 누구지?’

곧 죽음에 이르리라는 걸 직감한 청년은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썼다. 27년에 걸쳐 형성된 수많은 기억들 사이에서 유년의 시간을 움켜쥐었다. 6살 때 뛰어놀던 집이 그려졌다.

고향은 경기도 광주였다.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었기에 세파의 고난에서는 다소 비껴가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경북대 행정학과에 입학할 때까지도 사회에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을 뿐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의 유학생이 그러하듯 학비 일부라도 손수 벌어야 했는데 녹록지 않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체능계를 제외한 과외가 전면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생의 벌이란 막노동이나 공장, 식당의 잡일 정도였는데 군 복무까지 마친 청년이 선택한 건 우유 배달이었다.

집, 어머니, 친구, 학교, 그리고 우유! 새벽 일찍 숙소를 나와 우유배달을 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는 기억에 이르니 한 여름의 새벽 기운이 느껴져 왔다. 무대 위 커튼이 열리듯 세상은 다시 열렸고 여명이 뿌려놓은 빛은 아직 하늘에 남아 있었다. 1987년의 일이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일었던 ‘난 누구인가?’라는 의문은 여름방학을 마칠 때까지도 떠나지 않았다. 동기생들이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그 해 가을 부산 범어사 산문을 열고 청련암으로 들어갔다. 그저 이러저런 사념을 정리해 볼 시간을 갖고 싶었을 터였다. 청련암을 선택한 건 현대 선무도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던 양익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선무도(禪武道)는 삼국시대에 밀교수행법으로 들어 온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의 별칭이다.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맥이 끊어져 가고 있었는데 양익 스님이 연구해 체계화시켰다.

행자가 아닌 거사로 지내는 산중 생활임에도 마냥 좋았다. 청년에게 한 밤의 수면(睡眠)이란 새벽예불을 잠시 기다리는 동안 맞는 휴식이었다. 푸른 쪽물이 하얀 옷감에 배어가듯 청년은 산사 정취에 그대로 젖어갔다. 3개월 후 양익 스님 앞으로 나아가 고했다.

“출가 하겠습니다!”

▲ 대광명사 봉사단체 ‘사무량심’은 매월 두 차례 독거노인 150세대를 찾아 도시락을 전달하고 말벗도 되어준다.

경북대는 2학년 중퇴로 매듭지었다. 1988년 사미계를 수지한 목종(木鐘) 스님은 은사 양익 스님을 7년 동안 시봉한 후 태백산으로 들어가 삼척 영은사의 옛 암자터에 삼성암을 짓고 가부좌를 틀었다. 암자 정진은 2004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졌다.

산에서 내려 온 목종 스님은 부산 반야사 주지 소임(2005)을 한 만기 본 후 2009년 부산 해운대구 시내 한 복판에 대광명사(大光明寺)를 개원해 본격적으로 법을 펴기 시작했다. 불교대학을 열어 2500여 년 동안 피어 오른 법향(法香)을 올곧이 전했다. 독거노인들의 무료급식과 도시락 배달 등의 봉사활동에 진력할 ‘사무량심’과 함께 장례문화를 선도할 ‘대원염불 공양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대광명사 신도들의 신행과 포교 소식을 담은 사보잡지 월간 ‘아름다운 인연’을 발행했다.

목종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광명사 신도들은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위해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간단없는 정진을 이어갔다. 그 결과 대광명사는 개원 5년도 안 된 시점에서 신도 3000여명을 품었다. 2017년 6월에는 서울 서초구에 대광명사 포교당 ‘지금선원’을 개원했다.

무대의 커튼이 닫히듯 세상의 문이 닫혔다면 대광명사와 지금선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고 당일 스쳐 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놓지 못하고 천착하게 된 건 왜일까?

“의식을 잃어가고 있을 때 ‘죽음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고 이후에도 그 의문이 귓전에 맴돌았는데 묘하게도 방점은 나에게 다가온 ‘죽음’이 아닌 죽음을 맞이할 ‘나’에 찍혔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사회에 헌신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내 존재와 실체에 대한 갈무리가 필요했던 거다. ‘나’를 ‘나’라고 명확히 말할 수 있는 확신이 필요했던 거다. 강원이나 선원으로 발길을 돌려 그 해답을 찾았을 법도 한데 목종 스님은 7년 동안 청련암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사스님의 지도에 의지해 정진하면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대광명사 사부대중은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위해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간단없는 정진을 이어가고 있다.

선무도, 즉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은 몸과 마음, 호흡의 조화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관법(觀法)에 토대를 두고 있어 수행지도에 따라 지관(止觀)과도 연결될 수도 있다. 목종 스님으로서는 불교금강영관의 최고 반열에 오른 스승이 있었으니 굳이 선원에 갈 이유는 없다고 보았을 터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확신, 양익 스님이 심어주었을까?

“아닙니다. 그 확신은 제 스스로 세워야 했습니다.”

자신을 내던질 시공간이 필요했다. 도반과 함께 봐 두었던 영은사 암자터를 일구기로 작정하고 길을 떠났다. 암자터는 영은사에서 더 올라가야 했는데 거리만도 8km. 청련암에 머물던 사형사제들과 거사 등 10여명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 주어 20m² 남짓한 암자가 들어섰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아 허기를 부여잡고 절을 지었다. 놀라운 건 그 불사 함께 했던 거사 중 5명이 훗날 출가했다는 사실이다. 그 중 목종 스님의 제자가 된 스님도 있다. 삼성암 공덕이다. 태백산 삼성암 10년 정진에서 캐낸 건 무엇일까?

“행복입니다!”

진여불성을 보았다거나 연기법을 체득했다는 게 아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았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행복(幸福)을 들어 보일 뿐이다.

“행복 범주에는 즐거움과 편안함이 포함됩니다. 평소 갖고 싶었던 명품 가방을 어렵게 손에 쥐면 무척이나 기쁘겠지요. 여기서 하나. 그 가방이 기쁨을 전해 준 것일까요? 아니면 가방을 품은 자신이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상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는 데 착각입니다. 그 대상을 본 우리 자신이 기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 가방을 갖고 싶었던 건 나였다는 사실을 어느 새 잊고 가방만 가지면 기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방에 집착한다. 물욕(物慾)의 시작이다.

“물욕은 결코 가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발, 옷, 자동차, 아파트 등 그 폭은 무한히 확장됩니다. 그 물욕을 채우려 싸우고, 때로는 상대를 속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연속입니다. 갈애(渴愛)를 해갈할 방범은 딱 하나 입니다. 가방을 갖겠다는 마음, 혹은 생각을 거두는 겁니다.”

가방을 갖지 않겠다고 작정하면 가방과 기쁨의 연관성은 사라진다. 아울러 가방과 고통의 관계도 끊어진다. 번뇌 하나 말끔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의식에서 소유욕을 떼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여, 목종 스님은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스님은 삼성암 일화를 들려주었다.

▲ 창건과 함께 발행되고 있는 월간 잡지 ‘아름다운 인연’은 출세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암자에는 전기시설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지역 날씨라도 알아야 산중 생활이 다소나마 용의할 것 같아 라디오 한 대를 구입했다. 처음에는 날씨만 듣고 껐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방선(放禪)만 하면 라디오에 손이 가더란다.

“청량한 바람 소리, 나뭇잎 부딪는 소리 좋은 것도 처음 몇 달입니다. 라디오 전파 타고 들려오는 사람 목소리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방선이 아니라 수행 중에도 라디오를 켜고 싶어졌다. 이래서는 안 될 일이다. 라디오를 작은 방 한 구석에 밀어 놓았다. 신기하게도 라디오는 하루도 안 돼 스님 앞에 버젓이 나타나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될 일이다. 라디오 건전지 두 개를 모두 빼내 숲으로 던져 버렸다. 방선 후 산책을 나섰는데 어느 새 자신은 숲에서 건전지를 찾고 있었다. 기어코 두 개의 건전지를 가져 와 라디오에 넣고 볼륨을 높였다.

“갈애·집착이 무서운 줄 그 때 알았습니다!”

목종 스님은 그 라디오를 손수 부숴버리고서야 정진일로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한다.

“버림에는 직접적인 행동을 수반한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비움 또한 행동양식을 포함하고 있지만 버림이 좀 더 직관적이고 사실적입니다.”

목종 스님의 ‘버림’에는 비움과 무소유의 삶을 당장 이 자리에서 실천에 옮기라는 뜻이 함축돼 있다. 말이나 생각에 그치지 말라는 사자후이기도 하다. 이쯤 되니 목종 스님이 찾으려 했던 ‘나’, 그리고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나’가 읽혀진다. 소유 보다는 무소유의 길로 들어서려는 마음이 불성(佛性)이요, ‘참 나’임을 설파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버리는 일부터 시작해 보라 했던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광명사를 세우고 지금선원을 연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삼성암에서 건진 보물을 대광명사에 풀어놓고 있는 목종 스님이다. 불현듯 궁금했다. 삼성암 정진은 늘 수승했는지!

“어느 정도 이룬듯한데 다음 날 아침이면 산산조각 났습니다. 웬만큼 올라선듯한데 저녁 달 뜨면 땅 속으로 꺼져갔습니다. 절망의 연속은 거의 3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깨달음? 내 업으로는 부처님 법 만난 것만도 다행이다.’”

희유한 일이다. 수행은 그 때부터 증장되기 시작했다. 그때야 은사 양익 스님이 말씀하신 ‘하심(下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수행하는 사람은 하심 해야 한다 하셨는데 그 하심은 예의범절 차원의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 놓아야 하는 하심이었습니다. 완전한 비움이기도 합니다.”

목종 스님의 법문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목종 스님의 실참실수 프로그램에 도전해 보시라! 목종 스님 특유의 관법과 선법 매력에 흠뻑 젖을 게 분명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목종 스님은

1987년 범어사 양익 스님 은사로 출가
1995년 태백산 삼성암서 10년 정진
2005년 부산 반야사 주지
2009년 부산 대광명사 창건
2017년 서울 지금선원 개원

 

[1428호 / 2018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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