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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상사 지엄 스님 문하에 입실하다

기자명 해주 스님

현장 스님 유식학 흠모했지만 입당 후 화엄학 중심도량 향해

▲ 의상 스님이 지엄 스님에게서 화엄을 배웠던 종남산 지상사.

의상 스님은 험난한 해로로 입당해(661년) 이듬해 장안 종남산 지상사에 당도하였다. 원효 스님과 헤어진 후 지상사에 이르는 도중에 의상 스님의 심경에도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원효 스님과 함께 현장 스님을 찾아가려던 발걸음을 지엄(600~668) 스님에게로 돌렸기 때문이다.

원효와 의상 스님 유학 시도
현장 스님의 명성에 큰 영향

원효 스님과 도중 헤어진 뒤
의상 스님 심경 크게 변한 듯

입당 후 지엄 스님 명성 듣고
종남산 지상사서 문하에 입실

중국, 각종 학파와 종파 형성
화엄종 등 13개 종파가 확립

수나라 때 창건된 지상사는
화엄조사 주석하며 전성기

오직 서사불퇴의 서원으로
화엄법계 들어 법성 노래해

물론 ‘송고승전’의 ‘의상전’에서는 의상 스님이 유학하려던 동기가 당나라 교종이 번성하였음을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교종 중에서도 특히 현장 스님의 유식교학이 융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원효전’에서 서술한 원효 스님 입당 동기가 현장 삼장의 ‘자은문’을 흠모한 때문인 것에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원효 스님은 의상 스님과 11년에 걸쳐 두 번이나 입당을 시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원효 스님이 유심의 도리를 깨닫고 도중에 유학을 포기한 반면, 의상 스님은 종남산으로 가서 화엄종의 제2조가 되는 지엄 스님의 문하에 입실한 것이다. 원효 스님의 ‘오도송’이 널리 회자되면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 같은 밤을 보냈지만 의상 스님의 경우 아무런 일도 일어남이 없었다고 해서 의상 스님의 깨달음을 간과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당시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자. 원효 스님의 오도가 높이 숭상되는 것에는 전혀 이의가 없다. 단지 의상 스님의 경우를 다시 보자. 오도에는 깨달음의 기연이 있다. 해골물의 경우 의상 스님은 밤에 잠자다가 목이 마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 땅굴인줄 알고 잠을 잘 잤던 곳이 옛무덤이었음을 안 뒤에도 귀신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말이 없다.

이 점을 볼 때 의상 스님에게는 땅굴이나 무덤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고, 먼 길을 걸어서 지쳤어도 자는 도중 목말라서 잠을 깨지도 않을 만큼 건강에 무리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의상 스님은 37세였다. 따라서 그 달라진 환경이 의상 스님에게는 깨달음의 기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의상 스님은 오로지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서사불퇴(誓死不退)의 서원으로 가던 길을 계속하여 화엄경교를 더 깊이 공부하였고, 그리하여 화엄법계에 들어가 법성을 노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상 스님의 깨달음의 기연은 화엄경교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신라에까지 그 융성함이 전해졌던 중국불교 교종의 상황과 유심설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 중국불교는 경율론 삼장의 번역과 아울러 새로운 교학이 발달하고 학파 내지 종파가 형성되어 갔다. 4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비담종을 효시로 성실종·삼론종·열반종·지론종·섭론종·율종·선종·천태종·정토종·법상종·화엄종·진언종 등 13종이 확립되었다.

이 가운데 ‘화엄경’의 ‘마음[心]’ 교설과 연관이 깊은 종파로서 화엄종은 물론이고 지론종·섭론종·법상종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마음[心]에 대한 이해는 각기 다른 차이가 있다.

지론종은 보리유지 삼장 등에 의하여 역출(502~512)된 세친의 ‘십지경론’을 소의로 하여 혜광(468~537) 스님을 개조로 성립하였으며, 남도파와 북도파로 나뉘게 된다. 섭론종은 진제(499~569) 삼장이 번역(563)한 세친의 ‘섭대승론’에 의거하여 담천(542~607) 스님에 의해 형성되었다. 원광법사도 담천 스님으로부터 섭론종의 교의를 배웠다고 한다.

‘십지경’의 일심설을 북도파는 망식의 심식설로 보고 남도파는 진심의 심성설로 본다. 후에 북도파는 섭론종에 합해지고 섭론종은 법상종에 합해진다. 섭론종은 8식 망식 외에 제9 무구식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론종 남도파는 화엄종에 포섭된다.

자은법상종은 현장 삼장이 규기 등의 제자와 함께 ‘성유식론’을 번역(659)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현장 스님은 인도에서 17년(629~645) 간의 구법을 마치고 수많은 불전을 가지고 돌아와, 600부 반야계 경전을 비롯하여 역경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장 스님의 한역을 신역이라 부른다. 현장 스님은 당 태종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역경을 진행하였다. 대자은사에는 현장 스님이 인도로부터 가져온 불전을 보관하기 위한 대안탑(7층)이 건립(652년) 되었다.

이처럼 역경에 주력하면서 유식학을 널리 편 현장 스님의 법상교학은 만법유식설이다. 모든 것은 제8 아뢰야식의 식소변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심식설은 망식설이다.

원효 스님의 오도송에 보이는 “심생즉종종법생”의 심설은 여래장을 설하는 ‘대승기신론’(진제 역)의 심의식설에 나온다. ‘대승기신론’의 여래장심은 진망화합심이다. 중국 화엄종에서는 이 ‘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을 여래장연기종으로 배대하였다. 따라서 원효 스님의 오도송은 스님의 마음[心]에 대한 관점이 망심의 유식설에서 진망화합의 여래장심으로 바뀌게 됨을 의미한다.

▲ 지엄 스님이 스승 두순 스님을 따라 머물렀던 종남산 백탑사, 삼계교를 창시한 신행 스님의 탑원사찰이다.

그리고 원효 스님은 다시 보법화엄의 청정 진심으로 다가감을 볼 수 있다. 스님은 ‘화엄경소’를 짓다 ‘십회향품’에서 절필하고 회향하러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대중교화의 무애행을 펼칠 때 “일체 걸림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라고 천명한 것은, ‘화엄경 보살문명품’의 게송이다. 후에 ‘화정국사(和靜國師)’로 불리게 된 원효 스님의 화쟁원리 역시 화엄 일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의상 스님은 처음 입당 유학을 계획했을 때는 원효 스님과 마찬가지로 현장 스님의 명성을 듣고 유식설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덕화상에게서 배운 ‘열반경’의 불성설인 여래장설에도 조예가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이 당나라에 들어가서는 단월가의 도움으로 중국불교의 당시 상황을 좀 더 두루 파악할 기회를 가졌다고 하겠다.

그때 지엄 스님이 지상사에서 화엄교학을 연구하고 ‘화엄경’의 가르침을 펴고 있었다. 의상 스님은 이미 신라에서 ‘화엄경’을 열람하였을 것이고, 그 화엄교를 지엄 스님이 펴고 있음을 듣고는 지상사의 지엄 스님에게로 발걸음을 돌리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엄 스님은 두순 스님에 의해 12세 때 출가한다. 두순 스님이 어느 날 길을 지나가다가 만난 어린 동자가 불법을 담을 그릇임을 알아보시고 부모에게 찾아가 출가시키도록 한 것이다. 지엄 스님은 달(達) 법사에게 살펴 도와주도록 맡겨졌다. 스님은 당시 융성하던 불교교학을 두루 섭렵하였고, 지상사에 머물고 있었던 지정(智正) 스님에게서 ‘화엄경’을 배웠다. 그리고 60권 ‘화엄경’ (불타발타라역, 418~420)을 소의로 화엄교학의 기초체계를 마련하게 된다.

지상사에서 의상 스님이 배우고 연구를 더한 ‘화엄경’의 진심은 바로 여래장자성청정심이고, 여래성기심이다. 여래성기심은 여래의 마음 즉 여래성이 그대로 일어난 마음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나 만덕을 구족한 마음 즉 여래성기구덕심(如來性起具德心)이다. 이러한 유심설을 의상 스님은 법성성기심(法性性起心)으로 강조하고 있다.

지상사는 종남산 북쪽 산기슭의 천자골짜기[天子峪]에 위치하는데, 수나라때 창건되었고 당나라때 화엄종 조사들이 주석하면서 그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종남산 기슭에도 다양한 학풍과 수행방편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업사(淨業寺)의 도선(596~667) 율사는 ‘사분율’의 번역(혜광, 402~412)으로 설립된 율종을 완성하였다. 도선율사는 정업사에서 늘 재를 올려 천공을 받았는데, 의상 스님에게 그 천공을 대접하기도 하였다.(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좀 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또 초당사는 삼론종의 조정이다. 구마라집(344~413) 스님이 역출한 삼론에 의거해 길장(549~623) 스님이 종파로서의 교의를 체계화 하였다. 현재 초당사에는 구마라집 스님의 사리탑과 화엄종 제5조 규봉종밀(780~841)스님의 기념비가 모셔져 있다.

또한 지엄 스님이 스승 두순 스님을 따라가 한 때 머물렀던 순화사(淳化寺)도 지상사 올라가는 종남산 기슭에 있다. 순화사는 삼계교(三階敎)를 창시한 신행(信行, 540~594) 스님의 탑원(塔院) 사찰이었는데, 771년에 백탑사(百塔寺)로 개명되었다. 현재는 ‘삼계교조정 화엄종지상도량 백탑사(三階敎祖庭華嚴宗至相道場 百塔寺)’ 라는 사명(寺名)으로 소개한 안내판이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백탑사에는 수령 1700년 된 은행나무가 보존되어 있다. 사찰의 유구함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삼계교는 13종 종파에는 들지 않지만 국가에서 삼계교적을 금단(600)하기 전만해도 불교계에 일대 충격을 줄만큼 삼계불법을 숭신하는 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순화사는 신행 스님의 영탑 소재지라 하여 삼계교도들의 탑이 많이 불어나게 되어 백탑사라 개명되었다고 한다.

의상 스님이 입당한 때에는 이상에서 언급한 종파만이 아니라 제일 늦게 설립된 진언종을 제외한 대다수의 종파가 형성되고 종지를 선양하는 교학이 이루어져 갔다. 의상 스님이 지엄 스님을 처음 만난 해는 용삭 2년(662년)이다. 스님은 38세, 지엄 스님은 61세 되던 해이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서는 그때 지엄 스님이 전날 밤 꿈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한 예로 의상 스님을 맞이하였다고 전한다.

큰 나무 한 그루가 해동에서 생겨나 가지와 잎이 번성하여 신주(중국)까지 덮었다. 그 위에 봉황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가 있어서 그 광명이 멀리까지 비치고 있었다.

지엄 스님은 그 꿈을 깬 후 놀랍고 이상하여 도량을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곧 바로 입실을 허락하였다. 의상 스님이 화엄의 오묘한 지취를 깊은 데까지 분석해 내니, 지엄 스님은 영특한 재질을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의상 스님은 더욱 새로운 이치를 발현하여 깊은 것을 끌어내고 숨은 것을 찾아내니 스승보다도 낫게 되었다고 전한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28호 / 2018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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